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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혁 Dec 17. 2018

오늘도 최초의 악수는 물건너갔다.

윤동주 - 쉽게 쓰여진 시

밤 11시, 생활관 독서실에 앉아 읽는 “쉽게 쓰여진 시”.  이 시는 절대로 쉽게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손을 맞잡겠다는 윤동주의 선언이 절대 쉬웠을 리 없다. 그 전에 쓰인 그의 모든 시는 그 “최초의 악수”란 불가능하다고 자꾸만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자신이 부끄럽고 한스러워 우물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흉해 돌아서고, 실오라기 같은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내일도 모래도 계속 선연한 참회록을 써야만 한다고 고백했던 그가. 이렇게도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그가. 선언하듯 자신의 손을 잡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쉬웠을 리가 없다.


쉬웠을 리가 없다. 그가 써내려간 몇 개의 시, 자기혐오의 고백들은 어떤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한 줄 한 줄이 새로웠다. 자신이 항상 부끄럽고 싫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그러한 감정을 해소하거나 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말하거나 하는 부분은 찾기 힘들었다. “쉽게 쓰여진 시”를 빼고는. 윤동주 시의 대부분은 종착점이 없는 무수한 부끄러움의 기록이었다. 그 고백들의 무더기를 해치며 나는 (적어도 그의 시대에서) 자기화해란 요원한 것이며, 부끄러움은 해결이 불가능하리라고 말했던 윤동주를 만났다. 하지만, 아닌가? 그는 악수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유난스럽게 그의 악수를 생각해야 했다. 자기화해란 불가능하다는 그의 생각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가 시를 씀으로써 이를 증명했다면, 나는 삶을 살아내며 철저히 깨닫고 있었다. 항상 어떤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내가 죽도록 미웠고, 나의 결함에 대한 용서는 늘 뜻대로 안됐다. 세상의 어두운 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삶을 살고 싶었지만, 내 삶의 유지를 걱정해야 하는 작은 존재라 잘 될 리가 없었다. 무언가가 항상 그렇게 부끄러웠고 해결책은 없었다. 내 모습을 제대로 보기 싫은 순간들은 계속됐다.


그래서 주제넘지만 윤동주가 나 같다고 생각했었다. 주제넘지만 그의 악수선언에 배신감마저 느꼈다. 우린 닮은 게 참 많아서 영원히 흑화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서.


그의 악수는 그래서 무엇인가. 해석을 찾아보니 그의 악수라는 행위는 종교적인 신념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보는 견해가 다수다. 시를 쓰며 윤동주는 종교적으로 성숙해진다. 그는 1년 전에도 <십자가>를 쓰며 자신에게도 예수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기꺼이 피를 흘리겠노라고 말한 바 있었다. 기도와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희생을 기꺼이 바라게 되었으며,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 그래서 그는 조심스럽게, 최초로 작은 손을 뻗어 자신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단한 과정이다. 그는 이 노답 문재에 조금이나마 답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윤동주가 찾은 답을 나는? 찾을 수 있는가? 그가 온 마음을 다해 써낸 자기구원의 기록을 보며 여전히 나는 흑화의 최전선에서 나를 싫어하고 있었다. 물론 신앙이 없어 비슷한 구원을 경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신념의 한 조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내가 나와 화해할 수 있게? 대체 무엇을 경험해야, 무엇을 해야 나도 나에게 조금은 떳떳해질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자신은 없다. 아무것도 떠오르는게 없다. 신념으로 무장한 청년시인과 노답 자기혐오 최강 군인인 나와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그는 믿는 무언가가 있었고 지고지순하게 이를 따라가 자신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나는 믿는거 그런건 없고 내가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길에 대해 의심만 잔뜩 했다. 내가 남들을 돕는 삶을 살면 돈을 벌 수 있을까. 싸움을 피할 수 있을까. 내 작은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신념으로 다가가려는 나를 끌어내려, 되고싶은 종혁이와 노답인 종혁이 사이의 간격만 더 넓히는 꼴이었다.


내가 그처럼 방황하고 부끄럽더라도 나의 길을 확실히 믿었다면, 기꺼이 그 모든 슬픔으로 약속하고, 그 모든 리스크들을 감수하고,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으로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가 기꺼이 피를 흘리겠다고 이야기 한 것처럼 나 역시 나를 불살라 다른 이들을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못하겠지 나는 노답이니까. 나의 길을 믿을 수 없으니까.


김종혁은 윤동주가 아니니까.  그래서 시인도 못되고 위인도 못되며 내 삶의 소망을 실현시키는 사람도 못됐다. 난 그냥 볼수록 싫어지는, 우물 안에 비친 사나이의 모습일 뿐이다. 윤동주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오만했다.

아.... 내가 좀 더 싫어지는 기분이야


생각을 마치고 책을 덮는다. 새벽 한시. 나만 불을 끄면 완벽할 어둠이 찾아올 생활관 독서실. 불을 끈다. 이제 어둠을 내몰 수 없다. 시대처럼 오지는 않겠지만 어쨋든 이제 아침을 기다려야 한다. 연등시간이 끝났기 때문이다. 오늘의 끝을 붙잡고 있었던 나는 내일 아침이 소시지 야채볶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하지만 나에게 손을 내미는 일은 아침에 배를 채우는 일보다 더 어렵다.


최초의 악수는 오늘도 물건너갔다. 내일도. 모래도. 아마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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