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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불 Aug 28. 2017

사적이고 공적인 음악 감상실

커피의 친구는 참 많다. 짐 자무쉬의 영화 제목처럼 담배가 친구일 수도 있고, 쌉싸름한 커피와 잘 어울리는 달콤한 디저트가 친구일 수도 있다. 흡연도 음주도 하지 않는 내게 몇 안 되는 '어른의 취향' 중 하나가 커피인데, 나의 커피 친구는 담배도 디저트도 설탕과 프림도 아닌 음악이다. 


사실 음악을 듣기 좋은 카페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카페는 출처가 불분명한 재즈나 클래식을 틀거나 (아마도 높은 확률로 인터넷 라디오이거나 IPTV의 음악 감상 채널이라 짐작한다.) 음원 서비스 차트 상위권을 틀어둔다. 흘러간 올드팝 정도를 틀어 두면 차라리 양반인 경우가 많다. 사실 배경음악 따위 아무 상관없이 즐겁게 이야기를 하거나 이어폰으로 귀를 꼭 틀어막는 손님들이 대부분인지라 사장님의 안목과 취향을 엿볼 수 있는 플레이리스트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카페의 음악이 중요하네 마네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만, 결국 그 음악이라는 것은 손님의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좋은 음악' 이라야 대부분의 손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 같다. 


사실 나도 그냥 대강 잠이나 깨려고 커피를 마시고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러 카페에 다니는 사람이었다. 취향 아닌 것을 억지로 하고 있는 걸 너무 싫어하기 때문에, 카페에서 선곡한 음악 들으며 스트레스를 받느니 그냥 이어폰을 꽂고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듣는 편이었다. 그런데 서울의 어느 카페에 드나들면서부터, 일과를 마치고 나서 혹은 시간이 날 때 그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에 들르고, 그곳에서는 절대로 이어폰을 꽂지 않는 나만의 규칙을 만들고 지켜가게 되었다. 계기는 아주 단순하다. 커피가 맛있고, 음악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 카페에 처음 갈 때는 사장님이 두 분이었는데, 이제는 세 분이 되었고 직원 분들도 더 생겼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두 분의 사장님의 음악 취향이 나와 맞는 구석이 있었다. 한 분의 취향은 내가 과거에 무척 좋아했던 음악들의 총합이라면, 한 분의 취향은 현재의 취향과 미래에 좋아하고 싶은 음악들의 총합이었다. 그렇게 나는 언제 가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작은 카페에 매료되었다. 


그 카페의 선곡 리스트에서는 아주 사적인 취향이 보인다. 그 사적인 취향이란 매우 넓고 깊은 바다와 같다. 사람이 평생 음악을 들으면서 딱 한 가지 만을 듣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조금이라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느샌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음악을 듣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성장기에 좋아했던 노래를 아직도 듣기도 하고, 부모님의 취향을 통해 의외의 보석을 발견하기도 하고, 의도적인 학습을 통해서 좀 더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에 빠지기도 한다. 매장에서 음악을 튼다는 제한적인 환경 때문에 대체로 소수의 장르로 모아지는 경향은 있지만, 가끔은 예외도 존재하고, 그 몇몇 장르 안에서도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음악을 듣는 나는 그 흐름들을 통해서 짐작한다. 아, 오늘 사장님은 이런 기분이구나, 이런 음악을 좋아하셨구나, 이런 것을 새로 발견하셨구나! 남의 취미생활 구경이 얼마나 흥겨운지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그리고 그 사적인 취향은 가끔은 직원의 사적인 취향이나 단골손님의 사적인 취향이 되기도 한다. 음악 취향을 아는 단골손님이 등장하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을 간혹 틀기도 한다. 나는 그 카페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이 나오면 기분이 무척 좋아진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라서이기도 하지만, 타인에게 좋은 것을 들려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음악을 선곡한 사람에게도 나의 취향이 어필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손님이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서로의 좋은 취향을 내보이고 공유하며 취향의 공동체를 이룬다. 곧, 개인의 취향이 공적인 취향이 되는 것이다. 


개인의 취향이 공적인 것, 모두의 취향이 된 유명한 사례를 재즈 팬들은 이미 알고 있다. ECM 레코드의 수장인 만프레트 아이허의 경우이다. ECM은 만프레트 아이허의 취향에 의거한 레이블이라고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레이블의 초창기에는 '미국의 민족음악' 으로서의 재즈에 관심을 기울였고, 아르보 패르트를 시작으로 현대음악을 소개하기 위해 뉴 시리즈를 발매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민족음악으로서의 재즈'를 지향하는지 다양한 국적의 아티스트가 연주하는 재즈와 그 인접 장르를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만프레트 아이허의 취향과 관심사의 변화를 반영한다. 그리고 그가 음반으로 만들어 세계에 소개한 이 음악들은, ECM 레코드를 사랑하는 팬들을 만들었다. 그들은 만프레트 아이허와 취향을 공유하며 음악 감상의 지평을 넓혀 나가는 것이다. 레코드 레이블과 리스너의 만남을 넘어 우리 모두는 취향의 공동체를 이룬다. 언어도 국적도 뛰어넘은 취향의 공동체라니 얼마나 멋진가! 


다시 서울의 한 카페로 돌아오자. 그 카페에서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손님이 얼마나 되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대체로 그런 손님들은 이 카페의 독특한 철학에 동의하는 사람들일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다. 커피는 정성스럽게, 그리고 그 커피와 매일매일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은 공들여서, 이렇게 극진하게 손님을 대접하는 곳과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나는 커피의 친구로 음악을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 가만가만 음악을 듣는다. 그곳은 나의 학습의 장소이며, 취향을 갈고닦는 장소이다. 편안하게 들으면서도 이내 허리를 세우고 소리에 집중하게 되는 곳, 그곳은 아주 사적이고 아주 공적인 음악감상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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