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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불 Sep 13. 2017

도구 음악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경험에 비추어 생각했을 때 이건 반은 거짓말이고 반은 참인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취미로 서예를 해서 이런 저런 사람들을 본 결과, 글씨 깨나 썼다는 양반들은 만 원짜리 연습 붓을 쥐어도 그럴싸하게 글씨를 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 또한 아무 거나 쥐어줘도 제법 그럴싸한 모양을 낼 수 있다. 그래서 이 말은 참이다. (내가 장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런가 하면 글씨가 제법 손에 익었다 할 무렵부터 비싼 붓 큰 붓 좋은 붓 특이한 붓 좋은 먹 고급 종이 등등을 찾아대는 서예 동호인들의 고약한 습성을 나부터 잘 알기에 장인이 도구 어쩌고 하는 말은 순 거짓말이기도 하다. 아 거, 당연히 비싼 종이에 비싼 먹을 써서 비싼 붓으로 쓰면 글씨는 때깔이 난다! 정말 말 그대로 때깔부터 다른 것이다. 취미생활인들이 장비병 걸린다 하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분야를 막론하고 통한다. 뭔가를 알게 되면 당연히 더 좋은 것을 찾는 게 보통 사람의 욕심이니까. 


하지만 어떤 값싼 도구라도 좋으니 내가 간절하게 갖고 싶은 것은 붓이나 비싼 먹 같은 게 아니라 악기이다. 집 앞의 피아노 학원에서 모자란 재능으로 더듬더듬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고모네 손자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작은아버지의 기타를 집에 가져와 더듬더듬 연습했던 일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냥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항상 이야기하지만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편은 아니라서 악기 연주에 대단한 천재성을 보이거나 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나는 그냥 음악이 좋았고 음악에 대해서 배우는 게 좋았다. 음악으로 빚어내는 세계들이, 내가 건반 위에서 내 맘대로 조를 바꿔 좋아하는 노래를 연주하는 일이 재미있었다. 


음악을 만들어 내거나 나의 노래를 부르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나는 그저 지금까지 악기만을 배우고 싶을 뿐이라는 건 좀 신기한 일이다. 그냥 악기 앞에 앉아서 아무 소리나 내는 게 즐거웠다. 리코더로 꾸밈음을 내는 법은 이모부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웠고, 피아노 학원에서 직접 제본한 악보 책으로 가요 반주를 배우면서 엄마가 좋아하는 옛날 노래들을 배웠다. 생각해보면 모든 일에 그랬던 것 같다. 아름다운 것을 직접 만들어 내는 것은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나는 그저 아름다운 것을 항상 바라보고, 느끼고, 즐기며 그것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일 만을 좋아할 뿐이었다. 보통 무언가를 좋아한다면 그것을 만들고 싶어 한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저 순수하게 악기라는 게 좋은 것 같다. 소리가 나는 신기한 물건들, 사람마다 각자 다른 소리를 내는 신묘한 도구들. 


우리 집 이모부들은 악기도 참 잘 다루시고 노래도 잘 하신다. 한 분은 직장인 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하신다. 유튜브를 뒤지다가 이모부의 연주 영상을 찾았는데, 블루스 느낌의 기타 솔로를 아주 멋지게 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 그냥 매일 허허 웃기만 하시는 이모부가 그런 연주를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였다. 이런 일을 겪고 나니 도구라는 것은 아주 재미있는 방식으로 사람의 내면을 드러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냥 쓰는 물건 한두가지에서도 그 사람의 흔적이 배어나 '아 이건 그 사람의 물건이구나!' 하고 짐작할 수가 있는데, 그의 습관과 그의 내면을 소리로, 기왕이면 꽤 듣기 좋은 소리로 표현해주니 세상의 많은 도구 중에서도 악기는 역시 제일 매력적인 것이다. 


사람의 목소리도 좋아하지만 나는 악기 그 자체의 소리가 좋다. 가사도 없고 목소리에서 드러나는 감정도 없는, 그저 추상으로 추상을 표현할 뿐인 신기한 세계. 내가 기악곡을 듣는 이유이다. 기악은 Instrumental Music이라고 하는데, 예전에 도서관에서 빌린 어느 책의 첫 챕터에 이 말을 '도구 음악'이라고 번역해 놓아서 어이없어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어이없는 게 웃겼는지 아직도 까먹지를 못한다. 뭐 맞기야 하다. 도구를 사용한 음악. 도구 -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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