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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영낭자 Jan 31. 2017

내 남편은 집안일을 돕지 않는다

4박 5일간의 설 연휴가 끝났다.

둘째 예정일이 코앞이라 시댁도, 친정도 안 가고 남편이랑 큰애랑 집에서만 내내 뒹굴방굴했다.

남편은 대구까지 장거리 운전 대신 탭으로 보고 싶었던 웹툰을 보거나 게임을 하고

나는 음식 장만과 설거지 대신 보고 싶었던 책 읽고 TV 보고 틈틈이 출산 가방을 쌌다.

먹고 싶은 음식은 배달시키거나 반찬가게에서 사다 먹고,

설거지는 하루 종일 쌓아놔도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었던

생애 다시없을 편하고 좋은 명절이었다.


이런 내용을 자주 가는 맘 카페에 올렸더니 댓글이 줄줄 달린다.

'정말 생애 다시없을 명절이네요' '둘째가 복덩이네요' '전생에 나라를 구하신 듯'...

순식간에 나는 부러움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다른 엄마들이 올린 '명절 후기'를 보니 자랑 글을 올린 게 살짝 미안해진다.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낸 제사상 사진을 올리며 '이게 정상인 건가요?' 하소연하는 글부터

'시댁에서 무리했나 봐요. 친정 와서 몸살 났네요.'

'끝도 없는 설거지~ 미쳐요.'

'남보다 못한 남편, 한 대 칠 뻔했네요.'

'찜질방 가고픈데 사람 너무 많다고 오지 말래요. 흑흑~'

대한민국 주부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사연들이 차고 넘친다.


서울역에서 어떤 시민단체가 고향 내려가는 사람들에게 고무장갑을 나눠주며

남자들에게 집안일을 도우라고 독려하는 뉴스가 나왔다.

인터뷰하는 남편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

"이번 설에는 아내를 잘 돕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멘트가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참 거시기하게 들렸다.

돕는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자신은 집안일에서 아내보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다는 뜻이다.

집안일을 '돕겠습니다'가 아니라 '같이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남편들은 왜 아무도 없는가?



집안일은 돕는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것


친구들에게 공공연히 '독신주의자'라고 설파했던 내가

남편과 연애 두 달만에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

어느 날 남편의 자취방에 가서 저녁을 얻어먹었는데 싱크대 선반과 수납장 곳곳에

신기한 주방도구들이 즐비했다.

달걀 거품기(우리 집에선 뭐든 숟가락으로 휘저었다), 과도 (우리 집은 사과도 식칼로 잘라먹었다),

심지어 과일이나 채소의 잔류농약을 제거해준다는 파우더까지...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주방도구를 남편은 능숙하게 사용했다.


저녁을 얻어먹었으니 설거지는 내가 해야지 싶어서 고무장갑을 끼려는데

남편이 얼른 다가와 자기가 설거지를 하겠단다.

"설거지 안 도와줘도 돼. 내가 할게."

그러자 남편이 정색하며 하는 말,

"집안일은 누가 누굴 도와주는 게 아니야. 같이 하는 거지."

그때 나는 이 남자와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성들의 평일 평균 가사노동시간은 2시간 32분.

남편들은 평균 18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152분 vs 18분

위의 통계는 2014년 기준인데, 같은 집단을 대상으로 한 2007년 조사에선

여성은 4시간 24분, 남성은 22분으로 나타났다.

264분 vs 22분.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줄었어도 여전히 남성보다 길고,

남성들의 가사노동 시간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다행히 우리 부부는 이 통계에서 벗어나 있다.

객관적으로 재보지는 않았지만 남편과 나의 가사노동시간은 얼추 비슷하다.

남편이 일 때문에 바쁠 땐 내가 좀 더 많이 하고,

내가 바쁠 땐 남편이 좀 더 많이 하는 식으로 적절한 균형을 맞춰 간다.

그 비결은 결혼 9년 차인 지금도 내 남편은 집안일을 '돕지' 않고 '같이' 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TV 드라마를 보며 가장 짜증내는 장면은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의 겉옷을 받아다가 옷장에 넣으며 하녀처럼 졸졸 뒤따라 다니는 아내들의 모습이다.

집안일은 아내가, 바깥일은 남편이 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남편이 가장 한심하게 생각하는 인간 유형은

"와이프가 아침을 챙겨주지 않아서 굶고 다녀요"라고 말하는 남자들이다.

"지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지 밥은 지가 챙겨 먹어야지. 왜 엄한 와이프 탓을 하나?"

그럼 나는 옆에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맞아.


솔직히 말하자면 남편을 만나기 전에는 여자인 나조차도

집안일은 여자가 더 많이, 더 주도적으로 하는 게  맞다는 무의식적인 고정관념이 있었더랬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시장에서 일하고 와서도 집에 와서 설거지하고 우리 먹일 반찬 만드느라

자정 넘어 주무시던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자라서였는지도 모른다.

우리 아빠는 집안일과는 아예 담을 쌓은 양반이었다.

당신이 먹은 라면 냄비 하나조차 설거지하지 않아 냄비에 남은 라면 국물이 썩은 적도 있었고,

주말 아침에 엄마가 일하러 나가시면 딸내미들이 셋이나 되는데

지 아비 밥상 차려주는 년이 없다며 욕하기 일쑤였다.


그런 아빠에 비하면 우리 남편은 정말 다른 남자다.

일단 자기 밥은 자기가 챙겨 먹을 줄 알고

1년에 한두 번씩은 꼭 설거지하다 그릇 깨 먹는 나와 달리 설거지도 참 잘한다.

세탁기에 세제는 얼마를 넣어야 하는지,

청소기 먼지봉투는 어떻게 분리해서 버리는지,

전자레인지에 왜 포일을 넣으면 안 되는지,

주방 행주를 매번 삶기 어려우니 전자레인지에 2분 정도 돌리면 살균이 된다는 것 등등

소소한 살림 팁을 나에게 알려준 것도 바로 우리 남편이다.  


살림을 그렇게 하다 보니 육아도 그렇게 한다.

큰 애가 갓난쟁이였을 때부터 목욕은 남편이 전담했다.

기저귀 가는 거며, 분유 타 먹이는 거며, 트림시키는 것 등등...

심지어 큰 애는 나보다 제 아빠 품에서 더 잘 잤다.

우리 친정엄마 표현으로 나는 '젖만 주는 어미'고 나머지는 아비가 다 한다고 할 정도였으니...

둘째 출산 준비하면서 나는 아기띠 매는 법도 다 까먹었는데 남편은 다 기억한다.

그런 남편이 참 든든하고 고맙기만 하다.

남편이 아니었으면 이 헬조선에서 둘째 가질 생각은 엄두도 못 냈을 거다.


아이를 키우며 함께 동반자로 살아가야 남편이

집안일과 육아를 '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쩌면 육아휴직이니, 단축근무니, 적정임금 보장이니 하는 외부 제도적 장치보다도

남편들의 이런 전향적인 마인드가 이 땅의 많은 아내들을 구제하는 길이다.

물론 우리 남편이 출퇴근이 정해진 직장인이 아니라서 집안일을 공평하게 분담하는 게

가능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똑같이 맞벌이하면서도 집안일은 아내들이 더 많이 하는 현실을 생각해보면

이건 전적으로 남편들의 마인드가 여전히 '집안일은 아내 몫'이라는 시대착오적 발상에

머물러있다는 방증이다.

스웨덴, 덴마크 같은 북유럽 아빠들이 집안일과 육아를 당연한 '자기의 일'이자

아내와 '함께 '하는 일로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남편들도 그렇게 변해야 한다.

아내가 싱크대에 쌓인 그릇 대신 아이와 눈 맞춤할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야말로

남편이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배려이자 육아법이 아닐까 싶다.


설거지하는 남편의 뒷모습은 얼마나 섹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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