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워킹맘을 위한 성서: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엄마가 된 이후로는 시시때때로 이런 질문이 든다.
대개 이런 질문이 머릿속을 지배할 때는 엄마로 사는 것이 힘들 때다.
첫 아이가 생기고 나서 언제였나. 혼자 하루 종일 말도 못 하는 아이를 안고 우울함과 고독감에 시달릴 때
라디오라도 들어볼까 싶어서 켰는데 거기서 연애시절에 즐겨 듣던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 음악을 들으면서 깨달았다.
내 인생은 결코, 다시는 아이를 낳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임을...
나 혼자만 챙기고 나 혼자서만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처녀 시절의 모든 삶은 끝이다.
'엄마'라는 타이틀을 달고부터 '아이'라는 존재는 필수 옵션이 되어 나의 일상, 영혼까지 지배한다.
그런 삶에는 행복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은 무거운 책임과 인내, 희생이 따른다.
특히 처녀 시절 열심히 차근차근 쌓아왔던 나만의 커리어를 지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크다.
엄마로서 특히나 나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일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이란 어떤 걸까?
아이를 키우면서 일도 해야 했던 나는 그에 대한 해답을 목마르게 찾고 있었다.
그렇게 만나게 된 책이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다.
원제는 'I don't know how she does it'
번역은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
개인적으로는 번역이 더 마음에 들었다. 퇴근길, 혼자 어린이집에 남아 엄마를 기다리는 아들 녀석을 생각하며 미친 듯이 달려가 본 적 있었기에 본능적으로 마음속에 들어왔던 제목.
이 책은 케이트라는 변호사 워킹맘이 에밀리와 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일어나는 일을 1인칭 시점으로 풀어낸 소설이다. '케이트가 내 마음에 들어왔나?' 싶을 정도로 공감 가는 문장이 하도 많아 몇 구절만 소개하려 한다.
작년에 에밀리에게 왜 엄마가 일하러 나가야 하는지 몇 번이나 설명을 해보려고 했다. 이제 그런 얘기도 납득할 만큼 아이가 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집에서 계속 살려면, 네가 좋아하는 발레학원에도 다니고 방학 때 여행이라도 다니려면 엄마 아빠 둘 다 돈을 벌어야 해. 엄마는 자기가 잘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있어.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지지 않고 일을 잘 해낸다는 건 정말 중요하단다.(중략)..... 안타깝게도 자유주의 서구사회에서 이미 오래전에 수립된 기회균등의 원칙을 역설해봤자 다섯 살배기 아이의 원칙주의는 꿈적도 하지 않는다.
아이의 원칙에는 엄마가 신이다. 아빠는 기껏해야 그 신의 예언자밖에 안 된다.
희운이가 좋아하는 '로보카 폴리'의 미니카 장난감 16종이 맘 카페에 누가 4만 원에 올렸기에 눈 질끈 감고 지른 적이 있다. 그리고선 16종의 장난감을 한꺼번에 주지 않고 한 주에 하나씩 서프라이즈 선물처럼 공개하면서 했던 말.
"희운아, 이건 엄마가 일해서 번 돈으로 산 장난감이야. 그러니까 엄마가 '일'을 해야 희운이가 좋아하는 로보카 폴리 장난감도 사주고 희운이가 좋아하는 빵이랑 주스도 사줄 수 있어. 알았지? 그러니까 엄마 일하는 걸 이해해줘야 해."
그렇게 장난감으로 엄마가 일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서 설파한 게 교육적으로 잘한 짓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희운이는 엄마가 일하고 나갔다 오면 저 좋아하는 장난감이 하나씩 생긴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일하러 나가는 걸 쿨하게 보내줄 줄 알게 되었다. 심지어는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노트북 앞에 있으면 '엄마 일해~' 하고 명령(?)하기도 있었다.
아이의 원칙에는 엄마가 '신'이 맞다. 하지만 신은 인간을 조종(?)할 수 있다. 나는 그때 폴리 장난감으로 희운이를 조종하는 데 성공했다.
모성 법정.
"피고의 시어머니 바바라 섀톡 부인이 에밀리가 브로콜리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피고는 아주 좋아한다고 답했지요. 사실은 아이가 브로콜리를 좋아하는지 어떤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네, 하지만 시어머니에게 모르겠다는 말은 입이 찢어져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왜죠?"
"엄마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거니까요."
"큰소리로 말하세요!"
"엄마라면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피고는 몰랐지요?"
여자는 목이 죄어드는 기분이다.
모성 법정이라는 제목도 기가 막히지만, 주인공의 죄책감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도 기발하다.
엄마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들이 뭐가 있을까? 엄마여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엄마라면'이라는 모성 이데올로기는, 여자가 아이를 낳는 생물학적인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다. 문명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말이다.
남자들은 애 키우는 문제를 지갑과 결부 지어 생각하지만 여자들은 자궁으로 느낀다. (중략).... 내가 바라보는 폴리는 내가 없는 그 많은 시간을 우리 애들과 보내는 사람이다. 우리 애들을 사랑하고 예뻐하기를, 애들에게 뇌수막염 증세가 보이면 제일 먼저 알아차려주기를 바라야 할 상대다. 우리 세대 워킹맘의 문제는 우리가 아랫사람이라는 거다. 엄연히 보수를 지불하면서도 조금만 집안일을 도와줘도 머리가 땅에 닿도록 굽실거리고, 어떻게든 고용주 태를 내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케이트가 육아도우미인 폴리에 대해 불만이 쌓여가면서도 속으로만 삭히던 부분이다. 나는 다행히 아이를 키우면서 양가 어머니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 도우미를 들일 필요가 없었지만 내 주변의 워킹맘들은 달랐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아이들 어린이집도 같이 보내면서 친해지게 된 J 언니는 워킹맘이다. 부부가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 맞벌인데 언니는 일주일에 두 번 대학원 수업 때문에 남편보다 더 늦게 들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놀이터에서 언니보다 도우미 이모님을 더 자주 만났는데, 어느 날 도우미 이모님이 몸이 아파서 이제 그만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아쉬워했는데 웬걸? 주말 지나고 다시 오신 거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애 엄마가 새로 조선족 입주 도우미를 들였는데 하는 꼴이 아무리 봐도 시키는 일 이상 하지 않고 무엇보다 애를 살갑게 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동안 들인 정이 있어서 애가 짠해가지고 발길이 안 떨어지더라나. 우린 그 말을 들으면서 이모님 같은 도우미는 세상에 없을 거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모님은 손사래를 치며 이야기했다. 언제까지 계속할 순 없고, 맘에 드는 도우미 구할 때까지만 있겠다고...
그러던 어느 주말, 어린이집에서 학부모 참여수업이 있어서 J언니를 만나서 점심까지 같이 하게 됐는데 언니의 휴대폰이 계속 울려댔다. 새로운 도우미 면접이 있다고 했다. 나는 도우미 이모님한테 들은 얘기가 있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에도 조선족 도우 민가요?"
언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안 그러면 한 달에 도우미 비용만 200이 넘게 들어. 이럴 바에는 그냥 내가 일을 때려치우고 집에서 애 보는 게 낫겠다 싶기도 해. 일을 때려치울까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어."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언니가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중국어 능통자에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공기업에서 과장까지 올라갔다는데 나 같아도 일을 붙들고 살겠다. 워킹맘에게 일은 돈보다도 자기가 그동안 이뤄온 모든 것의 집약 체임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아실현이라는 걸 누가 모르겠나. 우리 애가 그 언니 딸의 장난감을 만졌다. 여자애가 날카롭게 소리 지르며 신경질을 냈다. 엄마가 없는 동안 저 애는 어떻게 크는 걸까? 도우미 이모님은 애 버릇 나빠지는 걸 알면서도 부모 눈치 때문에 혼내지도 못하고 벌벌 떨었다. 하지만 도우미 이모님 눈치 보는 건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언니는 조선족 도우미를 들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시급을 조금 더 올려주고 지금 계신 이모님을 붙잡았다고 했다. 월급의 상당 부분이 도우미 이모님 월급으로 나간다고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이래저래 워킹맘은 육아와 일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는 없는 걸까? 마음이 복잡해졌다.
하루하루가 애들, 회사, 남편 가운데 누구에게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가를 따지는 저울질의 연속이었다. 나 자신은 내가 신경 써야 할 대상 축에 끼지도 못한다. 내가 착하고 남을 더 챙기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그건 진짜 아니다. 이기심이 선택지 중에 없었을 뿐이다. 날 챙길 시간 따윈 없었으니까. 주말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면서 카페의 김 서린 유리창 너머로 카푸치노를 마시며 서로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커플이나 혼자 신문을 읽는 남자를 볼 때면 나도 저런 데서 음료나 주문하고 앉아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일을 하지 않을 때에는 엄마 노릇을 해야 했고, 엄마 노릇을 할 수없을 때에는 빚을 갚듯 일에 매달려야 했다. 나를 위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도둑질처럼 느껴졌다. 내가 아는 어떤 남자도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소용없었다. 그냥 이 분야에서는 남녀가 평등하지 않다고 해두자. 엄마들은 자기 몫의 죄책감을 털어내지 못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공감했던 부분. 나도 아이를 업고 산책 나갈 때, 카페 안에 다리 꼬고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는 아가씨를 볼 때면... 아, 나도 저런 데서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 서핑이나 하면서 폼나게 글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그리고 네일숍에서 두 손을 맡긴 채 한가롭게 케어를 받고 있는 엄마들을 볼 때도. 저런 여자들은 아이는 어디에 두고 저렇게 여유로운 걸까? 나만 이렇게 전전긍긍 아등바등한 걸까? 부럽기도 하고 조바심 나기도 하고 그랬다. 오직 나는 없고 아이만을 위한 하루하루가 반복되던 날들이었다. 그러고도 엄마가 되면 죄책감은 본능이 된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모든 것이 엄마 탓이다. 문제는, 남들이 굳이 엄마 탓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자기가 아빠라고 자랑해도 된다. 그게 힘의 상징, 좋은 가장의 상징이니까. 반면에 우리 회사 여자들은 아이들 사진을 책상에 잘 놓아두지 않는다. 직위가 높을수록 가족사진의 수는 적어진다. 남자가 자기 자리에 애들 사진을 두면 더 인간적으로 보이지만 여자가 그랬다간 별로 인간적인 인상을 주지 못한다. 왜냐고? 남자는 꼭 애들 곁에 있어줘야 하는 게 아니잖아. 그런데 여자들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이 책을 쓴 저자는 영국인이다. 와, 여성들의 지위나 대우가 아시아권보다 더 월등하다는 유럽에서도 이 모양 이 꼴이구나. 일하는 엄마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동서양이 똑같구나. 우리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론 아니, 유럽조차도 이러면 우리 여자들에게는 미래나 희망 따윈 없는 건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도 일하기 좋은 사회란 앞으로 몇백 년이 지나도 요원한 건가? 싶은 허탈함과 아득함도 동시에 밀려오는 거다, 젠장.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자 by 엘리슨 피어슨
덧글: 사실 이 책을 처음 읽은 지는 5년도 넘었다. 그동안 나는 육아가 힘들고 나의 정체성이 엄마인지, 작가인지 회의가 들 때마다 이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2019년에도 여전히 워킹맘의 삶은 버겁다. 세상 모든 워킹맘들이 하이힐을 신고 달리지 않아도 될 날은 언제나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