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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 Yoo Mar 09. 2021

[봤지] 미나리

내가 굳게 믿고 있는 방식을 넘는 방법 - 은은함에 대하여

유독 향이 좋은 나물, 미나리. 미나리가 그렇게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식물인지 미처 몰랐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은은한 향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미나리 향이 할머니의 향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은은하다는 말이,
이렇게 와 닿는 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


척박한 미국의 땅에 뿌리내린 부부는 각자의 방식으로 굳게 믿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


스티븐 연은 가족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받고 싶어 한다. 비록 바퀴 달린 트레일러에서 가족을 건사해야 할 처지에 놓였지만, 한국 농작물을 길러, 성공하기만 한다면, 가족들에게 아빠로서, 가장으로서,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한예리는 보이지 않는 힘에 집착하는 편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삶에서 종교나 기적으로 그 돌파구를 찾고 싶어 하는 절박한 마음. 남편의 모험이 달갑지 않고, 아들의 병에 늘 노심초사한다. 안정감을 원하면서도, 반대로 기적이나 초월적 힘에 기대고 싶은 두 가지 마음을 가졌다.


두 어른의 신념을 윤여정은 은은함으로 중화한다. 윤여정은 그거 다 별 거 아니라고 말하는 할머니다. 시큰둥함과는 좀 다르다. 농사가 잘 되든 좀 안되든, 심장이 아픈 손자가 좀 뛰든 말든, 딸아이 가족이 트레일러에 좀 살든 말든, 할머니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다. 그저 자신이 할 일을 할 뿐이다.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의 씨앗은 척박한 미국 땅에 뿌리를 내리고, 별다른 보살핌 없이, 물가에서 잘 자라난다. 은은한 향을 피우며, 늘 잘라내도, 그 자리에 또 피어난다. 공들여 키운 농작물을 잃었을 때도 미나리는 가족의 곁에 남았다.


(늘 불안이 디폴트이긴 하다마는) 요즘 느끼는 불안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들 각자가 굳게 믿는 방식을 넘는 방법이 돌파가 아니라는 사실이 좋았다. 간절함과 집착 너머에 존재하는 은은함. 구렁이 담 넘듯 왔다가 사라지는 은은함에 대한 승복이라는 사실이 나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손으로 너무 꽉 쥐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잠깐 힘을 빼고 스르르 그 힘을 놓았을 때 보이기도 한다. 삶에 대한 방관도 아니고, 합리화도 아닌 또 다른 방식. 나는 그것을 삶을 대하는 은은한 방식이라고 부르고 싶다.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할머니의 방식이 때로 그렇게 삶의 어떤 구간을 물 흐르듯 지나가게 한다는 것을, 또 한 번 확인한다.




#미나리 #윤여정 #데드라인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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