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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 Yoo Mar 10. 2023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했다.

내가 아이 낳기로 결심하기 어려운 두 가지 이유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결심을 주변에 육성으로 많이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글로 써 정리하는 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너무 근엄하게 선언하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가볍게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 생각을 잘 정리해 전달할 수 있을 때까지 나 자신을 기다려 다시 글 앞에 섰다.



나는 아이를 갖고, 또 낳는 것에 무척 관심이 많다. 좋은 양육 방식에 대한 고민, 본질적으로는 좋은 관계에 대한 고민을 오래전부터 진지하게 해 왔다. 그래서 더욱, 아이를 낳는 결심을 하는 일이 내게는 어려운 과제였다. 그 일이 정말 내 결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진실로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고 생각했기에, 스스로의 결정에 흔들리지 않을 심지가 내게 필요했다.


남편과의 대화도 무려 약 3~4년 정도 이어졌다. 대화하고 또 대화했다. 우리의 주요 결론은 '지금 이대로도 좋아'였다. 절대로 낳지 않겠다 보다는 '지금이 좋은데 왜 굳이 다른 선택을 해야 하지?'였다.


하지만 이 정도의 단호함으로는 외부의 자극에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회유하거나, 설득하거나, 더 큰 행복이 존재한다거나 하는 식의 설파로 자꾸만 이 결정의 유예를 막는 이야기들이 우리를 흔들리게 했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 아무리 충분히 행복하다고 말해도 진심으로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 사람들의 눈빛에 흔들릴만큼 우리 스스로를 충분히 설득시키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K 언니와 대화를 하다가 깨달았다.

내가 아이 낳기로 결심하기 어려운 두 가지 이유.


첫 번째는 나는 이미 관계 맺기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써버렸다는 것.


사람마다 관계 맺기에 드는 에너지의 총량이 있다면, 나는 이미 원가족과의 관계로 그 대부분의 에너지를 써버렸다. 특정 관계가 이미 내게 충분히 무거워서 아주 중요한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하는데 버거움을 느끼는 상태라고 이해하는 게 더 정확하다. (이 사실을 바라보고 인정하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배우자와 느끼는 유대관계 역시 다른 의미로 내게 삶의 아주 큰 행복감과 안정감을 주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관계 맺기에 큰 호기심과 열망을 느끼지 못한다. 이미 맺어 온 관계가 무겁든, 충만하든, 어떤 식으로든 나는 지금 맺고 있눈 관계로 내 삶이 충분하다고 느낀다.


새로운 관계 맺기에 신중한 사람일수록, 더 잘 상처받거나, 더 여린 사람일 확률이 높다. 나는 새로운 관계를 깊게 맺는 것에 무척 신중한 편이라 이 결정이 분명 더 어려웠을 것이다. 삶에서 만나는 더 중요한 결정들도 비교적 빠르게 해 온 내가, 왜 이토록 이 결정이 어려웠는지, 고민의 과정을 통해 새로 알게 되었다. 나에 대한 어려운 실마리 하나를 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두 번째가 훨씬 더 중요한 이유다.

나는 이미 누군가의 '사회적 엄마'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라이프컬러링을 업으로 삼으며 사람들과 만나 일상의 시간과 휴식에 대한 많은 대화를 나눈다. 내게는 그 시간이 진정으로 누군가를 도우며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 내는 귀한 시간이다. 워크숍에서 무수하게 다양한 결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중의 한 집단이 바로 '엄마들'이다.


육아를 도맡아 하는 엄마들이 나의 워크숍에 참석하면, 울거나 울컥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는 일 자체가 벅차게 감동적이라고 느끼는 엄마들도 있고, 나를 돌보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가 알아주고 나면 그 자체가 치유 적라고 이야기하는 엄마들도 있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돌봄'이라는 것이 참으로 위대한 일이라는 생각을 진심으로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희생 안에서도 나 자신을 돌보고 싶은 귀한 마음을 외면하지 않았음에 무한 응원을 날리고 싶은 마음이 함께 든다.


동시에 그 안에서 분명히 내 역할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꼭 육체적으로, 그러니까 자궁으로 아이를 낳아서 길러야만 진짜 돌봄일까. 살을 부대끼며 길러 낸 엄마가 '개인적 엄마'라면, 돌봄을 돌보는 일을 업으로 하는 나는 그들의 '사회적 엄마'아닐까. 하고.


'누군가를 돌보느라 지친 엄마들은 누가 돌보지?' → '나를 돌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돌보아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연결됐다.


아이를 낳지 않는 누구나 다른 사람의 '사회적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랑이 많고, 사랑을 깊게 나누어주는 것에 관심이 많다. 다만, 그 방식이 내가 원하는 방식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한 명의 아이와 관계를 맺는 방식 대신, 그 아이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방식으로. 그들과 연결된 대화, 연결된 마음을 나눌 때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충족감을 느낀다.


그런 내게, 사랑으로 타인을 돌볼 수 있는 일을 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건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사회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다. 하나의 생명을 온전한 사랑으로 길러내는 일이 고귀한 것처럼, 돌봄이 필요한 다수의 사람을 (특히, 엄마들을) 보듬어주는 일 역시 같은 무게로 귀한 일이라는 것이 내 고민의 종착역이 되었다.


내가 실천하는 사랑은 그래서 조금 다른 모양이지만, 내게는 충분히 충만한 질과 양의 사랑이다. 내게 가장 편한 방식으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을 이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마 나는 평생 누군가에게 사랑을 나누어주고, 또 받는 일을 반복하며 살 것 같다. 그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여러 경험을 통해 축적해 왔으니까. 그래서 더 이상 내게 육체적 엄마가 되는 일, 혹은 되지 않는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게 남은 사랑을 앞으로 더 많이 표현하고, 꺼내며 살고 싶다. 그게 제일 나답게 사는 일, 나로 행복하게 사는 일이라 생각한다.


더 이상 어설픈 변명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다. 내 사랑의 방식을 내가 결정하며 사는 삶. 그게 내가 가장 살고 싶은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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