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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ㄱㄴ Apr 12. 2019

생방송을 진행한다는 것

홈쇼핑 PD의 일

 방송이 시작되면 대체로 부조정실 내부는 조용하다. 쇼호스트의 멘트와 음악소리, 그리고 나의 디렉션만이 공간을 메운다. 이 무거운공간에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기록해놓고 싶다. 세어보니 총 340시간이 넘는 생방송을 진행했다. 때문에 이제는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 되어버렸지만 가끔씩은 실시간으로 전국에 송출되는 방송을 만들어내는 것이 꽤나 흥미로운 일 같기도 하다.



 팀장은 자주 "피디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무언가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을 움직여서 방송을 만들어내는 것이 주어진 역할"이라고 말하곤 했다. 입봉을 하고 방송을 해보니 실제로 그렇다. 다른 스탭들이 손을 움직이고 몸을 쓰며 일을 하는 동안 나는 말을 한다. 내 말에 스탭들이 움직인다. 그러니까 나는 말로 방송을 만들어낸다. 내 디렉션을 듣는 스탭은 총 10명이다. 때에 따라 더 늘어나기도 하지만 최소 인원은 이렇다. 방송 중에는 "카메라 감독님 메인에서 부감으로 갈게요, 오디오 감독님 비지 깔고 갑니다.기술감독님 저희 노말(전면 자막) 받고 바로 디테일로 넘어갑니다. 그래픽 감독님 노말은 1,3,5번만 갈게요. 쇼호스트님 재핑 왔어요. 메인 디테일입니다. 멘트 바로 가겠습니다. 하이, 큐" 따위의 말을 동시에 쏟아낸다. 내가 한꺼번에 준 디렉션에 대해 스탭들이 각자 반응하는 그 순간이 매끄럽고 조화로울 때, 목부터 머리 끝까지가 가늘게 찌릿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꼭 섬세하고 조심스럽지만 힘있는 교향곡을 연주 중인 오케스트라 같다. 내 역할은 각 파트의 연주자가 적시에 알맞은 템포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졸아드는 마음에 가만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손짓을 하며 디렉션을 내릴 때마다 나는 내가 지휘자가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입봉 전 본격적으로 방송 준비를 할 때 온 몸으로 걱정스러움을 표현하고 있는 내게 사수는 이런 저런 노하우를 알려주곤 했다. 그 중 하나가 주말에 집에서 쉴 때 티비를 보면서 책을 읽는 동시에 빨래를 개고 또 밥까지 먹는 연습을 하란 거였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홈쇼핑 피디는 동시에 오백가지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멀티태스킹이 숙달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다. 그 때는 하하 웃고 넘겼는데 첫 방송을 진행하고나서야 그게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실질적인 조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시간의 생방송 동안 화면에 나가는 모든 것은 피디의 책임이다. 비록 피디의 방송 경력이 5일이고, 다른 모든 스탭들의 경력이 15년, 20년일지라도 방송에 나가는 모든 것의 최종 판단은 피디가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각 스탭들이 맡고 있는 모든 영역을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챙겨야만 한다.

 나는 쇼호스트의 멘트를 들으며 어떤 멘트를 할 때 콜(고객의 주문 전화)이 오르는지 실시간 그래프를 확인한다. 그 포인트를 빨리 파악해서 방송의 주요 소구점으로 삼아야 한다. 심의 상 문제되는 멘트는 없는지도 물론 계속 체크한다. 해서 안 되는 멘트가 나갔을 때는 재빨리 정정 자막을 내보낸다. 쇼호스트가 멘트 실수를 했는데 피디가 발견하지 못해서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최악의 경우, 재판에 나갈 수도 있다. 쇼호스트의 멘트에 따라 컷이 제대로 넘어가고 있는지 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상파와 종편 주요 프로그램이 언제 끝나는지도 실시간으로 체크해야 한다.  홈쇼핑은 타이밍이다. (드라마 끝나고 채널 넘기다 홈쇼핑 틀었는데 쇼호스트가 "지금 채널 맞추신 분들~블라블라"라고 멘트를 한다면, 피디가 제대로 일 하고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피디들은 대개 주요 프로그램들이 끝나는 시간과 레퍼토리를 외우고 있다. 아침 드라마의 경우 원샷 -원샷 -투샷이 나오면 끝난다. sbs좋은 아침은 10시 7분에, JTBC 정치부회의는 18시 19분에 끝난다. 이걸 안다면? 9시와 17시에 주로 편성 되는 상품군인 식품 PD일 가능성이 높다. 방송을 진행하는 동안 쇼호스트 멘트가 끝나가면 자료 영상 어떤 것을 틀지, 자막 그래픽은 어떤 걸 내보낼지를 디렉팅하고 동시주문이 몇 명 들어오는지,  오디오 효과음은 뭘 넣을지, 매진을 칠 지 안 칠지.... 다 말하자면 TMI가 될 것 같아 여기까지만 하겠다. 입봉 직전 연습 방송을 진행하고나서 깔깔한 입에 억지로 밥을 욱여 넣으며 선배에게 "이거 한 사람이 동시에 할 수 있는 일이 맞긴 맞아요? 선배님 솔직히 방송 중에 그걸 다 챙기시는 건 아니죠?" 라고 물은 적이 있다. 컴퓨터라 해도 슈퍼 컴퓨터나 되어야 할 수 있는 일 같이 느껴졌는데, 내 CPU는 너무 구린 것 같았다.

 입봉 후 한동안은 부조정실 피디석이 곤욕스럽기만 했다. 뭘 봐야할 지도 모르겠는 수많은 모니터 앞에 앉아서 나이 많은 아저씨 감독님들이 날 쳐다보며 무서운 표정으로 "이번엔 어떻게 가요?" 라고 말하면 울고싶은 심정이 되었다. 머리는 자주 하얘졌고 방송이 끝난 후 퇴근길엔 자책감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내가 아무리 괴로워해도 편성은 정시에 도착하는 기차처럼 꼬박꼬박 왔고, 죽이되든 밥이되든 그 방송들을 해내는 동안 나는 점점 떨지 않게 되었다. 이젠 장비가 추가되거나 포맷이 바뀌는 특별한 방송이 아닌 일반적인 방송들은 감독님들과 농담까지 해가며 진행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많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은 여전히 강도높은 집중력을 요한다. 매 방송 시작 전, 나는 그 많은 일들 중 하나라도 빼놓지 않고 모두 돌볼 수 있기를 바라며 부조정실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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