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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강 Mar 18. 2024

함부로 깎지 마세요, 당신도

-  말의 가치를 떨어뜨릴 때 일어나는 일

1달는 1300원 대, 1유로는 1400원 대, 1위안은 180원 대네요.

돈에 있어 우리에게 1원은 아무 의미가 없지요.

"댕그랑 한 푼, 댕그랑 두 푼..." 이런 동요가 있던 시절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격세지감이지요.

적어도 100단위는 되어야 돈으로 칠 수 있다는 말은 우리 돈의 가치가 그만큼 떨어졌다는 이야기인데,

경제 용어로는 인플레이션이겠죠.

유명한 단어들이 그러하듯 인플레이션이라는 조어造語도 의미가 확장되어 사용합니다.

저 역시 경제적 의미가 아닌 다른 분야의 인플레이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단어의 원래 뜻을 한번 새겨보았습니다.



직업병이라거나 나이탓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모국어의 쓰임과 단어의 생로병사에 관심이 있는 편입니다.

'별다줄'처럼 별 걸 다 줄이는 유행이나 신조어 등에 허둥지둥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유행어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말이란 세대와 세태를 반영하고 그 수명도 마찬가지니까요.

그에 비해 이미 오래 전 사전에 박혀있는 단어들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은 속상합니다.

그중에서도 점점 증가하는 단어 인플레이션 사례 때문에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결별은 이별보다 더 확실하고 영원한 헤어짐을 말하고,

열애는 사랑보다 더 뜨거운, 그래서 약 3개월 간의 호르몬이 작용한다는 시기의 애정에 가깝고,

참담은 끔찍하고 절망적이어서 슬픔이 영원히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뉴스 기사나 방송, 무슨 당 대변인들의 입에서 매일매일 듣고 있는 단어죠.  

유튜브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클릭 수 전쟁이니 이해하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클릭수로 얻을 이익과 모국어의 가치가 떨어짐으로써 입게되는 피해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가 없니다.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들에 대한 기사에 붙는 '열애'라는 단어가 한없이 경박하고 뜨거운 이유는,

'사랑' 감기처럼 누구에게나 보이는 현상이지만, '열애'란 매우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단어이기에

과연 이 헤드라인을 쓴 사람은 둘의 관계를 내밀한 수준으로 아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만일 일면식도 없는 타인이 거라면 스토킹 같은 범죄에 대한 자백은 아닌지요?

지인이라면 더더구나 할 수 없는 말이죠.  타인의 사적인 영역에 대하여 공적으로 발언할 정도라면 그 지인 관계는 피탄이 난 것일 테니까요.


만일 두 단어가 비슷한 것이라 생각하며 쓴 것이라면 뉴스라는 일에 종사하는, 즉 모국어와 관련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지식이나 감각 없는 무책임함에 대신 부끄러운 것이지요.


네, 복잡한 생각에 "why so serious?"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도 압니다.

하지만 모국어는 나를 이룬 정체성이자 타고 난 재산이기에 순순히 값을 후려치게 둘 수가 없네요.

말, 호칭은 교묘하게 사람의 가치를 훼손시키거든요.


전에는 없었던, 비교적 최근에 생긴 못된 수식어를 하나 더 예로 들어볼까요?

@ㅇㄷㄱㅎ

 어느 순간부터 열애설의 주인공들에게는

각자 일의 경력을 잘 쌓은 사람들(주로 연예인이지만) 앞에 마치 호처럼 " 누구의 러브(하트표시) 누구누구"라고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수식어는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애칭일진대, 공식 뉴스에 왜 자연인인 한 사람의 이름 앞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낙인처럼 찍혀 나와야 할까요? 혹시 두 사람이 헤어질까봐 걱정되는 마음을 표현한 헤드라인일까요?

우리 모두 직업인으로서 자신의 경력이 공짜로 쌓이지 않았음을 알기에

누군가 마음대로 수식어를 붙이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 뜻이라 해도 싫은 경우가 있습니다.

율곡 이이를 신사임당의 아들로, 허난설헌을 허균의 누이로 소개한다면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당사자에게 실례일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역사적 인물이든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수식이 붙는 것도 유명한 사람들에 한해서라지만,

왜 타인의 가치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깎아내리는지 수 없습니다.


나아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고장난 자율신경계처럼 '사랑', '이별, '슬픔, '걱정' 같은 단어들로는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는,

중독자 같은 사람들로 사회가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해서요.



걱정 되는 것은 아이들입니다.

풋풋한 사랑을 '열애'라 하고 약간의 슬픔이나 잘못됨을 '참담'이라고 배우면

그 아이들은 또 어떤 단어로 더 강력한 기분을 표현하게 될까요?


무엇보다 인간은 언어로 생각을 발전시키는 동물입니다.

모국어에 인플레이션 현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모국어는 물론 우리 모두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은은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듯한 생각을, 보통 사람들이 다 겪는 수준의 슬픔은 슬픔이 아닌 것처럼 대해야 하는 그런 감정의 인플레이션을 강요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다보면 자신의 감정과 존재에 대해, 그 뜨거움과 강렬함에 대해 의아해 하고 나중에는 스스로를 부정하게 할 수도 있는, 불필요한 장애를 앓게 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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