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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강 Mar 24. 2024

아마도 계급은 셋..

- 꿈이 없는 자, 노동하는 자, 꿈만 있는 자...

의사파업이 일어났을 때, 별로 동요하지 않았던 이유는 순전히 행운이 따랐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가까운 사람 중에 큰 병원에 가야 할 만큼 아픈 사람이 없었고,

두 번째, 한국에서 살아오면서 의사가 파업하는 걸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으며,

세 번째, 검사집단과 의사집단 둘 다 셈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치킨게임을 하지는 않을 거고, 대충 서로가 잇속을 챙기며 성대한 말 잔치로 끝나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매일 나오는 뉴스는 파업의 규모가 점점 커진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마치 독두꺼비를 두드리기라도 한 듯 정부의 협박이 뒤따랐습니다.


그런데 의사협회에서는 증원 반대를 가장 크게 외치더군요.

잇따라 이런 말들도 이슈가 되었지요.

"국민은 반에서 20~30등 하는 의사를 원하지 않는다."라 든가,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라든가

"손바닥에 王자를 썼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하지만......"이라든가 하는 말들이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어떤 집단에나 이상하고 왜곡된 사람들이 있지요.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 존경하는 의사의 이름 한둘은 알고 있을 것이고,

각각 의사 덕분에 감사했던 적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의사들을 대표한다는 의사협회와 '어물전을 망신시키는' 저 말들로 인해

일반인들은 그렇잖아도 의심했던 것, 그러니까 의사 집단의 엘리트 의식이라든가, 의사 집단의 특권 의식, 계급적 차별의식 같은 것을 확인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 말대로 반에서 20~30등은 상상도 못 했을 우수한 뇌와 성실성을 가진 청소년들은 어떻게 저렇게 바보 같은 어른이 되었을까를 생각하며 솔직히 슬프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세월을 살면 중년을 훌쩍 넘어 인생의 황혼기에 선 사람들의 생각의 깊이가 저 정도에 멈출 수 있는지 신기하기도 했죠.


아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힘만큼은 누구보다 셀 두 집단이 치킨게임의 절정으로 치닫지 않았다면, 관심도 없던 전 의협 관계자의 지난 페북의 글을 읽지 않았다면 전 지금의 문제에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진짜 좋은 의사들 현 상황에서 자신들의 말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의협 관계자의 지난 페북을 반성하는 현재 글을 보면서, 목소리가 닿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습니다. 그의 전 페북에는 나름 긴 의견이 적혀 있었는데, 그중에는 '귀족노조'라는 말이 있더군요. 그리고 현재의 글에는 '쳇'이라는 단어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눈을 의심했습니다. 아마도 '쳇'이라는 단어 앞에 병렬로 나열된 단어가 인권, 민주주의 같은 것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쳇'은 시니컬함을 표현되는 데 사용하는데,  의사 당사자가, 그것도 정권 창출에 영향력을 가졌던 사람이 자기 자신들 집단의 일에 '쳇'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의사라는 직업인으로 '협회'에서 단체행동을 하면서 '노조'를 비판하는 것도 놀라웠지요.

자신들이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 바로 노동자로서의, 아니 노동자의 일반 행위를 뛰어넘는 사회 정치적 활동임에도 자신들의 '협회'와 '노조'가 다르다고 생각한다는 그 차별 의식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자신들은 전교 1등 출신이니 정부와 싸울 수 있는 수준이고, 노동자는 바로 그 단어에서부터 전교 등수와는 상관없어 보이니 정부 정책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죠? 기업주처럼 '귀노조'를 혐오하는 이유가 '노동'하는 주제에 먹고살만한 수준이 아닌 '호강' 수준의 임금을 받아내는 것처럼 보여서는 아니겠죠? 의사의 노동이 용접하는 노동보다 더 귀하고 어렵다는 차별의식 때문은 아니겠죠?

  

 조선 초에 양반이란 실상 "양인"을 뜻했습니다. 노예가 아닌 대다수 성인남성은 원칙적으로 과거로 관료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전통의 명문가, 권력 주변인, 그 어려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재력가만이 가능한 일이었겠죠.

그래도 적어도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훈구세력이 생기고, 그들이 신진세력을 막으며 조선은 활력을 잃어갔죠.

전 대한민국이 이때와 비슷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점점 노골적이고도 은밀하게 계급이 고착되는..

그런데 자신이 이 계급의 꼭대기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꽤 많죠.

전문가, 엘리트 집단.. 가끔은 사무직, 정규직, 대기업.. 이런 것들로요..


그런 건 너네나 갖는 거지. 너네가 꿈을 이루면 내가 누리는 거고. 나한테는 너무 짜치지 않는 직업이 필요할 뿐이고.


                     - <더 글로리>, 박연진 대사 중


김은숙 작가의 대사처럼 이 사회의 흔들리지 않는 계급은 진짜 재벌이나 금수저들 뿐이겠죠.

이름 있는 재벌 자식이 대치동 학원가에 출몰한다는 얘기를 저는 못 들어봤습니다.

치열한 입시 경쟁으로 자신의 계급을 유지해야 할 필요는 언제 흔들릴지 모를 직업인들이니까요.

즉, 우리 대부분은 평생 노동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소득이나 학업 등을 이유로 노동자라는 사실을 잊고 서로를 차별하는 것만큼 우스운 이야기도 없습니다.

지만 사회는 이렇게 분열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닿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노동자로서 당연한 단체 행동을 비난하거나 백안시하기도 합니다.

'귀족노조'란 말도 현 상황 의사에 대한 일반 시선도 '쳇'과 같은 시니컬한 태도에서 시작하죠.

그렇게 진짜 목소리가 닿지 않으면 그제서야 연대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렇대도 타인의 노동을 자신의 노동과 차별했던 시간을 뛰어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닿지 않는 목소리에 사람들은 거리로, 철탑 위로, 단식으로... 온 희생으로 목소리를 알리는 겁니다.


무신불립,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는 말은 「논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국가를 성립하는데 경제, 군대는 버리더라도 백성의 믿음이 없다면 국가는 무너진다는 말입니다. 이는 정치 행위에서도 통하는 말이 아닐까요? 어느 집단이라도 신의를 얻지 못하면 하고자 하는 말이 닿지 않는단 거죠.



귀가가 늦어진 몇몇 행인이 OO를 주의 깊게 바라본다. 여느 OO와 다른 것 같기 때문이다. 지붕 위 이층 좌석에 죽은 물고기의 눈처럼 움직이지 않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앉아 있다. 그들은 서로 밀어붙이며 앉아 있는 꼴이 생명을 잃어버린 것 같다. (중략) "세워주세요. 제발 세워주세요... 하루종일 걸어서 다리가 부었어요... 어제부터 먹지도 못했어요... 부모님들이 나를 버렸어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집에 돌아가기로 결심했어요. 자리 하나만 내주신다면 빨리 갈 수 있을 텐데... 난 여덟 살 먹은 어린아이예요. 여러분들을 믿어요..." OO는 달아난다!... 달아난다!... 그러나 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 하나가 먼지를 뒤집어쓰며 바큇자국을 악착스럽게 쫒아간다.  

OO를 빼면 이 구절의 시대를 짐작하실 수 없을 겁니다.

OO는 마차입니다.

1800년대를 산 로트레아몽의 <말도르노의 노래>라는 시인데, 마치 우리네 퇴근 시간과 닮아있습니다.

부르주아가 귀족을 대치하여 새로운 계급이 되는 동안,

우린 정교한 자본주의 속에서 분열되는 것 같습니다.

사방이 벽창호라면 노동자들은 연대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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