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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Jun 30. 2024

문해력의 이해

- 빼앗긴 것들에 대하여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

크게 4가지로 나뉘어있는 교과과정은 난이도 면에서 완만한 우상향 직선이 아니라고 합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고학년으로 올라갈 때 한 번, 그 이후 중고등을 거쳐 대학으로 진학할 때마다 몇 단계 정도 점프하는 구간이 있다고 하죠.

학원가에서는 방학마다 초등4학년을 위한, 중학 예비반, 고등 예비반을 위한 특강 등이 열리죠.

그렇다면 교과과정 설계자들은 학원 업계를 위하여 점프 구간을 만들었을까요? 당연히 그럴 리 없습니다.

그리고 학원이 성행하기 전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각 단계를 넘어갔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수학이나 과학처럼 특별한 과목에서 어려움을 겪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 시절에는 학교 선생님들이 보충 학습이나 숙제 등으로 결국 진도를 따라가게 만들었죠. 학습 태도 불량이나 사춘기의 방황 등으로 남보다 늦을지언정 마음먹어서 따라잡을 수 없는 구간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각 구간을 학원에서 점프시켜야 하는 건 요즘 애들 탓일까요? 당연히 그럴 리 없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이들을 둘러싼 환경에 있죠.

우리나라에서 요즘 아이들의 전형이라 하면 맞벌이 부모 밑에서 생활하며, 대화는 주로 학교에서 교우들과 나눕니다. 그나마 늦게까지 운동장이나 교실에서 놀거나 수다를 떨지 못하니 대화다운 대화를 길게 할 수도 없죠. 학교가 끝나면 학원 차에 실려 여기저기 스케줄을 마친 뒤, 집에 와서 잡니다. 저녁을 함께 먹는 가족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다 주말이 되면 가끔 조부모와 식사를 하거나 놀러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길어야 중학교 때까지, 고등학생이 되면 주말에도 학원에 가거나 공부를 해야 하죠. 이렇게 한 달, 일 년, 그리고 6년이 지나갑니다.

이 6년 동안, 대화다운 대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교과과정과 시험범위를 넘어선 관심사는 얼마나 다양할까요?

유튜브와 쇼츠와 학교 혹은 학원에서 얼굴을 보는 또래들 외에 볼 수 있는 삶의 형태는 몇 가지나 될까요?

 

<넉점 반>, 윤석중 시, 이영경 그림, 창비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어린이날 노래> 등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한 편쯤은 읊을 수 있는 동시의 지은이 윤석중 선생님의 시를 이영경 작가가 그림으로 풀어낸 그림책 <넉점 반>을 보면, 옛날 어린이들의 환경이 얼마나 풍요롭고 다양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야 현재와 비할 수 없고, 장난감의 다양함도 따를 수 없죠.

하지만 한 인간이 성숙해 가는 데 필요한 것을 중심으로 따져보면, 생활환경, 보육 환경, 언어 환경 면에서 현재가 얼마나 빈곤한지 이 그림책 한 권만으로도 있습니다.


아기가 아기가 가겟집에 가서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시냐구요
넉점 반이다

- <위의 책>


이 책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엄마가 아가에게 가겟집에 가서 시간을 알아오라 하였고, 아가는 시간을 알아냅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개미도 보이고 잠자리도 보이고 꽃도 지천이라 "해가 꼴딱" 지고 나서야 심부름을 마칩니다. 스포일러처럼 보이지만, 이 책을 실제로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림책은 동시 속의 행간을 그림으로 잔뜩 펼쳐놓았는데요, 시계가 있는 가겟집만 떠올렸던 독자에게 고양이와 온갖 사탕과 과자와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아가가 아니라도 가겟집 보느라 한 장 넘기기가 쉽지 않.

닭이 물먹는 담장길에는 풀꽃이 지천이고, 아가 키는 훌쩍 뛰어넘는 꽃밭 이쪽저쪽으로 학생이니, 신여성이니, 자전거니 하는 것들이 다양하기만 합니다.

수직으로 되어 있는 아파트의 한 칸인 생활공간일 때와 너르게 열린 마을 전체, 그것도 산과 강과 밭이 있어 사계절 내내 변화하는 생활공간일 때, 아이가 받을 환경적 자극은 얼마나 다를까요?

개개인이 시계를 갖고 있는 현재와 달리, 마을에서 가장 공적인 공간일 가겟집에만 있는 시계를 보러 심부름을 보내는 엄마와 그에 답해주는 영감님, 아이가 노출되는 언어적 환경은 얼마나 다채로울까요?

개미와 잠자리를 좇고 있지만, 그 곁을 지나다니는 어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아이를 향하고 있습니다. 마을 전체가 아이를 돌보는 환경은 다양한 사람들인 만큼 공주나 왕자처럼 대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정情이 있는 채로 여러 삶의 개성을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어린이가 자라는 자양분이 되어 '말귀'를 알아듣고, 삶의 이치에 대해 치기 어린 생각도 가질 만하였을 것입니다. 이 다양한 환경에서 자연스레 스며든 눈치코치가 바로 이해의 바탕이 되니, 한글만 뗀다면 나이에 따라 책 읽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글 읽기가 어렵지 않은 아이에게 초등 교과 대부분은 뒤쳐질 일이 없지요. 제법 열심인 아이라면 중고등 과정도 잘 따라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대학에 가는 일이야 전이나 지금이나 치열하기 그지없었으니 맹렬하게 공부해야 했겠지만, 적어도 '문해력'이나 '리터러시literacy'같은 어려운 말들이 문제가 되는 사회는 아니었겠죠.

옛날이 좋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해력이 문제라고들 하는데, 실제로 문해력이란 무엇이냐는 것을 떠올려 보자는 것이죠.

문해력을 말 그대로 풀자면 글을 이해한다는 뜻인데, 글은 본래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에 옛 어른들이 한 아이가 제 몫을 하느냐 마느냐를  '말귀를 알아듣는다'로 평가했던 것도 일리가 있지요.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이란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환경,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입장, 다양한 생각을 접해서 누가 요점정리를 해주지 않아도 세상을 이해하고, 그 나름의 원칙을 가지며, 사람 사는 원리를 빠르게 배울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길가에 핀 '며느리밥풀 꽃'을 보며 꽃 자체만이 아니라 시집살이 배를 곯다 시어머니 몰래 밥풀을 훔쳐 먹은 죄로 맞아 죽어 핀 꽃이라는 전설을 생각하고, 밥풀 때문에 죽도록 맞아야 했던 여성의 지위와, 아무리 밉더라도 밥풀 하나가 그렇게 귀했던 가난한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죠.

'찜통 같은 더위'라는 말은 한 번쯤 부엌에서 일을 도우며,

뜨거운 불길 위에서 펄펄 끓는 물 위의 채반에 얹혀 익고 있는 만두나 고기를 보아야 실감이 나는 표현일 겁니다.

강가에서 친구들과 놀며 억새풀을 뽑거나 잘라보려 애써본 기억이 있는 아이라야, '억센 고집', '억센 추위'라 할 때, 그 강도를 가늠할 수 있을 테고요.

좌: 꽃며느리밥풀(국립생물자원관)/ 우: 억새(doopedia)

    

하지만 이미 사회는 컨베이어 벨트가 있는 조립라인처럼 빡빡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한가하게 각종 체험을 시키자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 그럴듯한 대학 졸업자 중에서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의 비결은 한 가지로 귀결되곤 하죠. 바로 '책 읽기'입니다.

이를 위해 가정에  텔레비전을 없애거나 휴대전화를 금지하는 경우도 있고, 정성스레 책을 읽어주는 부모님들도 꽤 많지요.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소위 유태인의 교육법이라든가 케네디 가의 교육법이라고 알려진 것처럼 지적 토론이 생활화된 가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출퇴근하기 빠듯한 맞벌이 부부 집안에서, 조부모도 다르지 않게 살아왔고 그나마 만나는 시간도 얼마 안 되는 환경에서 토론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없겠죠. 또한 토론이라 하면 양쪽이 텍스트나 하나의 문제를 공유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책 읽는 성인은 드물죠. 또한 한 번의 시험도 실패하면 안 되는 우리나라 교육과정에서 책 읽기는 쓸데없는 시간낭비에 불과합니다.

초등학생 때나 중학생 때는 가능하다  할지라도, 이러한 환경 또한 부모의 여유(시간 역시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는 면에서)와 관련이 있고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중고등 6년 동안 달려가는 종착점인 대입을 위한 '수학능력'은 결국 문해력에 달려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생활이죠. 실제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맥을 이해하는 능력, '말귀를 알아듣는' 능력이라는 것을 사회인이라면 다들 알 것입니다.


문해력과 관련된 능력, 말하기, 읽기, 쓰기 등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의 기초 능력으로서, 그가 조직에서 일하지 않는다 해도, 유튜버나 틱톡커 같은 요즘 유행하는 직업이라도 반드시 갖춰야 할 능력입니다.

만일 뉴스를 보다가 잘못 선택된 어휘나 심각한 오타를 본다면 그 즉시 매체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글과 관련된 사람들은 오락 프로그램의 자막이 견딜 수 없는 경우도 많죠.

나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을 갖추지 못한 현자들을 신뢰할 수 없다.
-<불안의 책>, 페르난두 페소아, 오진영 옮김, 문학동네, 330p

페소아의 일갈인데, 글의 배경을 길게 인용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나는 언제나 음모, 책략, 비밀 조직, 신비주의 등 비밀스러운 것들에 거의 생리적인 혐오감을 느껴왔다. 특히 뒤의 두 가지가 불쾌하다. (...)
자신들이 이 세상의 기반인 위대한 비밀을 알고 있다며 허세를 부리기 때문이다. (중략)
그 비밀을 상기시키는 글을 쓸 때는 무슨 소리인지 통 알아들을 수 없게 쓴다는 것이다.
(중략)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긴 세월의 수련과 노력과 집중을 통해 천체의 비밀을 읽을 수 있게 됐다면서, 대체 왜 그보다 훨씬 적은 노력과 집중을 기울여 문장론을 습득하지 못하는가?


  - 위의 책, 329~330pp


그렇다면 일반적인 성장기와 빠듯한 집안에서 책 읽기를 빼앗긴 채 성장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이 질문은 대학시절 제가 했던 질문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제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았지만, 다른 분들도 그러하시겠죠. 이것을 나누는 일도,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는 현재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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