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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동이 Jun 09. 2019

러닝복 사러 가자

추리링은 이제 그만




외국인이 싫어하는 한국만의 패션이 있다. 한국에서 시작한 독특한 스타일.


정답은 등산복. 그리고 하나 더 있다.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면 3가지로 한국인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는 등산복 패밀리, 둘째는 셀카봉(이제는 자랑스럽게 타국에 수출해서 전세계인의 필수 여행 아이템으로 쓰이고 있다), 셋째는 '치마레깅스'다.



치마레깅스는 치마와 레깅스가 합쳐진 산물인데, 외국인들 시선에서는 바지 위에 덧입은 치마가 이상하게 보였으리라 가늠해본다. 언젠가 국민템이 되었던 치마레깅스는, 개인적으로 정말 내 취향이 아니다.


짐작하건데 레깅스를 만든 사람에게는 이런 심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에서 레깅스의 원조는 혹한을 이겨내기 위해 만들어진 쫄쫄이 내복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서양 친구들을 보니 내복을 밖에다가, 그것도 얇게 해서 저것만 입네? 하며 당황스러워 했으리라. 남사스럽게 엉덩이를 어찌 저렇게 드러나게 입을까 두려워 했지만 한번 입어보니 나쁘지 않았고, 그래도 동방예의지국 답게 엉덩이 부분만 자연스럽게 덮자, 해서 탄생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왜 이렇게 쓸데 없이 본인이 걸쳐 보지도 않은 레깅스의 탄생 과정으로 소설을 쓰고 있냐 싶을텐데, 레깅스가 (구) 여친을 (현) 아내로 만든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연인을 선택하는 여러 기준이 있을텐데, 나에게 있어 중요한 교집합 중 하나가 '운동'이다. '취미가 맞지 않다면 결코 사귈 수 없다'가 내 시덥잖은 연애 지론인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같이 즐기고 함께 하기 위해 연애를 하는 만큼, 그 사람과 즐거운 취미를 공유 하고 싶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무엇.


그 무엇이 각자가 지녀온 습관이 될 수도, 한 두번 참여했던 모임일 수 있으며, 언젠가 해보리라 마음 먹은 도전적인 버킷 리스트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와 어떤 인연으로 만날지 알 수 없기에, 함께 하는 '무엇이' 구체적인 '그것이' 되기까지 마음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어느 정도의 결, 취미의 취향은 비슷해야 한다. 물론 상대방이 너무 좋아서 내 모든 것을 뒤집을 만큼 사랑에 빠질 수 있으나, 사랑은 그렇게 오래 가지도,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도 않는다.



다행히 외향적이고 활발하며 부지런한 (구)여친과는 '운동'에 있어서 마음이 맞았다. 개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본가가 있는, 지질학적으로 천생연분인 만남이였기에 우리는 종종 천을 뛰었다. 

집에서부터 한강까지 거리는 약 3Km. 

비록 추운 겨울이었지만 젊은 남녀에게 날씨가 무슨 대수겠는가. 주말 아침 뿌연 물안개가 스멸스멸 올라오는 새벽녘에, 때로는 차디찬 밤공기가 폐까지 스며드는 깊은 밤에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한강을 달리곤 했다.






그런데 아쉬운게 한 가지 있었는데, 운동 '복장'이었다.


모름지기 운동의 시작은 '장비'다. 장비빨이 끝발이라는 말도 있듯이, 운동을 하려면 우선 장비가 뒷받침 되어줘야 하는데 (구)여친에게는 아이템이 부족해 보였다.(개인적인 의견이라 '~해 보인다' 라고 썼음에 유의해 달라) 평소에는 원피스도, 청바지도 스타일리시하게 입는 센스쟁이 친구였지만 유독 러닝 복장만큼은 뭔가 애매했다. 평일에 만난 차도녀, 오피스룩은 다 어디로 가버린걸까, 하는 기대치에 아쉬움도 섞여 있었다. 운동 약속으로 만날 때면 마치 레깅스치마를 보고 있는 듯한 답답함과 먹먹함이 내 시야를 조여왔다. 

불안한 마음을 들켜버린걸까. 심지어 하루는 그녀가 진짜 레깅스치마를 입고 나타났다. OMG!! 지금이야 당장 가위를 가져와 치마를 싹둑- 잘라버릴 담대함이 있지만(사실은 밤에 몰래 재활용수거함에 버릴거다)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다. 


서로 죽이 잘 맞아 편하긴 했지만 상대방의 패션을 지적하는 것은 자칫 큰 화를 불러오는 것을 알기에 조용히 (구)여친에게 다가가 물었다. 왜 전문적인 운동복, 즉 나이키 매장에 가면 마네킹이 입고 있는 쫙 달라 붙는 트레이닝복을 입지 않는지, 행여나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데 나 보고 싶어서 무리하게(?) 나오는 건 아닌지 돌려깍듯 물었다.




특별한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었으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면서 당연했다.


"몸매가 드러나는 옷은 부끄럽다는 것"

치마레깅스가 전국을 강타하며 베스트아이템으로 등극한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신의 힙(Hip)을 오픈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최근에야 필라테스와 요가가 젊은 여성들에게 일상적인 운동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요가복 브랜드(ex. 룰루레몬)의 대중화로 길거리에서도 쉽게 레깅스 패션을 볼 수 있다. 하지만 4년 전에만 하더라도 레깅스는 실내 운동복으로 잠깐 입었을 뿐이지, 길거리에 나서는 순간 신기하고 놀랍고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뒤따라 다녔다고 한다. 



사실 무엇을 입고 뛰는지는 중요치 않다. 

파자마를 입든, 오리털 파카를 입든 누가 나를 신경이나 쓸까.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에게 관심이 없는데, 스스로가 만든 규율에 자신을 가둬 놓는다. 당신이 무엇을 입고 뛰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고 그런 의식을 느낄 필요도 없음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설명은 하지 못하고 이번에도 돌려깍듯 설득했다.



"너를 돋보이게 해주고 싶어"

이것보다 더 달콤한 말이 있을까. 지금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좋은데, 아주 쪼금만 보태서 훨씬 더 돋보이게 해주고 싶다는 말로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한번 입어볼까? 한다. 이때가 기회다. 얼른 그녀의 손을 잡고 이태원 나이키 매장으로 향했다. 쭈뼛거리며 벙벙한 트레이닝 복을 고르는 그녀에게 쫄쫄이 레깅스를 건넸고,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탈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뒤 부끄러워하며 내 앞에 섰다. 나는 레깅스가 얼마나 편하고 심플하며 당신을 돋보이게 하는지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전했고, 신상 바람막이까지 추가해서 과감히 결제 했다.



이제는 러닝, 등산 뿐만 아니라 평상복으로 레깅스를 입는다.



확실히 장비가 더해지니 본인도 뛰는 즐거움을 더 많이 느끼는 듯 했다. 자연스레 나는 마라톤 대회에 함께 나가는 것을 추천했고(물론 5K, 10K 위주로 어렵지 않음을 설득했다. 삶은 설득의 연속이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많은 인파 속에서 러닝의 즐거움을 만끽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장점을 북돋아 주었을 때 (나를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과감히 고정 관념을 버리고 새로움을 시도한 그녀. 

이태원 나이키에서 일어난 순간의 선택이었지만, 낯선 것에 도전하고 시도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마주할 수 많은 변화에도 이렇게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것은 마음 문을 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내겐 러닝복을 사러 간 그날이 평생동안 취미를 함께 할 수 있는 동반자를 만난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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