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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동이 May 20. 2020

당신에게는 이야기가 있습니까?

이도우 산문집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를 읽고



이도우 산문집,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날씨가 추워지면 그 글귀가 가끔 생각나더군요.


이 책을 대표하는 메시지를 꼽는다면, 중간 즈음에 나온 이 글귀를 선택하고 싶다.
 




날씨가 추워지면, 그 글귀가 가끔 생각나더군요.
 

삶을 관통하는 지혜나 비즈니스적인 인사이트가 아니다. 이 책과 작가를 끌고 가는 한 문장이다. 매일 보고 지나가는 장면들, 가끔 마주치는 사건들 그리고 한 번쯤은 보았을 일들에 대해 작가는 질문하고, 생각하고, 연결 짓는다.  


특별한 경험이 에세이의 소재가 되지 않았다. 

동일한 여행지를 방문 한 경험, 택배 기사에게 골목길을 열심히 설명했던 일, 지나가다 피어 있는 꽃을 보며 사물에 꽃말을 붙이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을 기반으로 지난날의 아쉬움을 토로하고 앞으로의 희망을 이야기하며, 때론 고민을 해결할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모든 것들이 가장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하고 날씨가 추워지면 생각나듯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사람마다 경험의 깊이와 넓이가 다르기에, 작가의 해석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오히려 글을 읽으며 '이야기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나도 유년 시절이 있고, 가족과 친구가 있으며 그들과 함께한 추억이 깃든 세상이 있을 텐데. 그 이야기들은 어디로 흘러가고 누구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숨어 있을지 씁쓸하면서 궁금해졌다. 이제 막 100일이 넘어가는 아이를 키우며, 갓난아이에 집중하느라 어쩔 수 없이 주변과의 멀어짐을 받아 들어야 하는 지금. 과거를 끄집어내긴 이미 늦은 게 아닐까 하는 후회의 마음 한 편으로는, 지금의 순간을 미래에 추억하기 위해 기록하고 연결 짓는 ‘활동’이 필요함을 서둘러 깨닫는다. 





책을 읽는 중간까지 약간은 애매한 에세이가 아닐까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서두에 작가가 밝힌 것처럼 그리 중요한 담론과 통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소소하고 개인적인 기록에 불과함을 인지하고 본다면 내 평범한 일상을 재탐색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총평 : 강력한 원-투 펀치와 잽은 없지만 휘두르는 글러브의 바람에 코끝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에세이. 




밑줄 친 문장들


#낮과 밤의 산책로. 

p27. 어떤 장소에 밤에 도착하는 것과 낮에 도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여행의 시작이라는 사실도. 

그날의 경험 탓인지 같은 풍경을 다른 버전으로 다시 바라보는 일을 좋아한다. 


#봄날의 랜드마크. 

p37. 길눈이 어두운 건 평생 그렇게 어설픈 것들을 이정표 삼아 걸어왔기 때문일까. 매사에 그랬는지도 몰라…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걸까. 

알려주신 랜드마크들이 정확하던데요? 잘 찾았습니다. 왜 글썽해지는 기분일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에 대하여 

p42 한 번도 그렇게 버려진 사물의 마음이 되어보지는 않았던 것처럼. 새삼 그 마음을 알아버리니 서글프기보다는 그저 담담해졌다. 


#사물의 꽃말 사전 

p61 사물에도 어울리는 말을 붙일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 예를 들어 카메라의 꽃말이 ‘찰나’라면 동네책방의 꽃말은 ‘아지트’가 될 수도 있으리라. 


#오늘의 부피 

p67 ‘오늘의 부피’라 할까. 페이스트리 빵의 결처럼 겹겹이 포개진 날짜에 미묘한 느낌을 받곤 했다. 


#어디 가나요 에밀리 

p170 인생에서 너무 늦은 모험이란 과연 있을까. 기회는 어느 시절을 지나면 다시 오지 않는 걸까. 

일생을 수없이 냄비와 솥에 무언가를 끓여보았던 이들은 마음속에 아무도 모르는 또 하나의 솥이 있다. 밖으로 티는 안 날지라도 그 솥에선 무언가가 조용히 끓고 있다. 


#새로운 해석 강박증 

p230 똑같이 친숙하고 낯익은 설정의 두 작품을 보고, 한 작품은 짐작 가는 내용이지만 그래서 더 편안하고 즐겁게 보았다는 리뷰가 달리고, 다른 한 작품은 결말까지 너무 뻔해서 지루했다고 한다. 파격적이고 기발한 설정의 두 작품을 보고, 하나는 독창적이고 예측할 수 없어 손에 땀을 쥐었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감독 본인만 아는 것 같다고 투덜대는 리뷰가 달린다. 

진짜 본질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어떤 방식이든 잘 풀어나가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가 닿았다면 기쁜 일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반대일 뿐. 진심을 담아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스타일은 그다음에. 


#너에게 그 말 그대로 

p295 애정이 있는 가까운 이들에겐 언제나 그 말 그대로, 어떤 함의나 간접적인 가시가 없는 담백한 언어를 건네고 싶다. 숨은 뜻을 요령 있게 내비치는 이들이 복잡한 내면을 가진 듯 멋있게 느껴지던 시절도 있었고, 함의와 행간은 여전히 흥미로운 문학적 텍스트이지만, 그것이 일상을 잠식하게 두고 싶지는 않다. 살아갈수록 그 말 그대로, 그 마음 그대로인 이들이 곁에 남는다. 나도 그들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다. 


#울타리들이 말하는 것 

p318 그 후로 서로가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지는지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으니까. 사람들 사이에 울타리가 있다는 것만을 절실히 깨닫는다. 

이 사람의 울타리는 싸리나무구나. 산사나무구나. 탱자나무구나. 돌담이나 벽돌이구나... 

순전히 개인적인 이미지라 큰 의미는 없지만, 늘 이미지에 기대어 살았던 내겐 타인을 느끼는 나름의 촉감 같은 것인가 보다. 

울타리는 다가오는 걸 막는 장치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울타리가 있는 곳엔 출입문이 있고, 어쩌면 그 문을 내기 위해 빙 둘러 울타리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서로가 가까워지는 과정은 그렇게 공간을 존중하면서 천천히 한 바퀴 돌아 출입문을 찾는 노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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