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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Dec 25. 2017

그 해 5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광주,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 나에게 5.18 광주란 >

  

5.18 마지막 날 새벽에 많은 시민이 학살되었던 옛 전남도청이 현재 아세아문화사업으로 일방적 리모델링 및 재건축 사업이 이루어졌고 이에 항거한 전남도민분들이 기습점거농성을 이루어가면서 현재 250일이 넘게 옛 전남도청을 역사적 사료로 남기기 위해 노숙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광주는 내게 많은 배움을 주었고 분노를 주었으며 깨달음을 주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도, 현재에는 일어날 일이 없는 먼 과거의 이야기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해서 우리가 몰랐지만 알아야하고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이며, 다른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길거리에 죽어있는 시신이 내가, 혹은 나의 가족이, 친구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  광주이야기에 대한 나의 이야기 >

  

당시 정치적 악용의 수단이 되었던 광주, 북괴군 간첩이니 김대중의 수하이니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 언론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광주시민은 무자비하게 학살되었다.

본인이 광주이야기에 대해 알아가면서 제일 분노한 것은 계엄령선포로 나라를 지켜야 할 국가군대가 일반 시민들을 학살하고, 시민들이 이유도 죄도 없이 죽어나갔다는 것이다.

시민군과 대학생부터 장애인, 노약자, 임산부, 아이까지 이유도 그저 광주시민이라는 것과 눈에 띄었다는 이유로 학살당했다.

그 시신은 온전치 못했고, 보호자의 동의 없이 시신을 다루고, 묘지를 옮기는 일까지 했다.

광주의 첫 번째 희생자는 청각장애를 가진 김경철씨로 들리지 않은 장애인을 매질하며 말하지 못한다고 매질로 죽여버렸다. 또한 죄 없는 임산부인 최미애씨를 총살하고, 총살당한 이후까지 발길질해대던 태어나지 않은 생명까지 앗아갔다. 그들의 죽음은 소요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내려왔다는 계엄군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광주시민들은 이유도 죄도 없이 죽어나갔다는 사실에 나는 분노했다.

애당초 이유는 필요 없었는지도 몰랐다.

광주가 저항이 심할 것을 예상해 그동안 전두환 정부가 견제하고 있었다 해도, 굳이 광주가 아니더라도 다른 지역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으며 안타깝게도 그 표적이 광주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청산부터 지금까지 죄 없이 죽어나간 이들에게 대우를 해주지 않고, 죄 지은 사람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다. 이번 광주도 똑같다고 생각한다.

전두환은 1심 사형을 받았지만 결국 풀려나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잘 살고 있다.

그리고 자서전에는 광주에 대한 발포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한다.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가 없는 이상한 상황이다. 그런 현실에 화가 나고, 죄 없이 희생된 생명들이 안타깝고,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에서 저항하며 마지막 날까지 민주주의를 외쳤던 그들이 존경스러웠다.



< 부끄러운 언론, 기자란 무엇인가 >

  

나는 부끄러웠다. 우리 정부뿐만 아니라 힘없었던 혹은 침묵했던 우리 언론과 기자들이.

그 당시의 정부는 신문과 방송을 포함한 모든 언론들을 통제하고 억압했다.

진실을 알고 있었던 기자들은, 혹은 현장에서 진실을 목격했던 기자들은 침묵했다.

신문에 처음으로 실린 광주는 오보가 되었다. 그리고 후에는 광주폭동이라고 정의하면서 자신들의 공수부대의 만행을 정당화시켰다. 화가 나고 분노했다.

나의 언론에 대한 분노는 아마 나의 꿈이 기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탄압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지만, 진실을 보도하면 목숨이 온전치 못할 것을 알지만

그들이 원망스러웠고, 부끄러웠다. 돌이켜 생각해보아서 내가 당시의 기자라면 ‘나는 진실을 보도했을까? 혹시 침묵하진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 보았다.

당시에도 광주이야기를 보도하지 못한 많은 언론인들이 사직서를 냈다고 한다.

만약에 내가 그 때의 언론인이었다면 나도 그리하지 않았을까 싶다.

  


유르겐 힌츠페터라는 독일기자는 당시 목숨을 걸고 시민군을 촬영했고, 당시의 참혹함을 세계에 알렸다. 특히 지금까지도 진실을 마주하고 역사바로알기에 힘쓴다는 것이 감동적이었다. 다른 나라의 이야기에 목숨을 걸고 또한 평생을 걸어 회고록을 남겨 5.18광주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자극적이었다.

당시 광주에는 우리나라 기자들과 외국기자들이 있었는데 시민들은 외국기자들에게 환호했다고 한다. 외국기자들만이 자료를 수집해 방송과 신문에 내보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점은 광주시민들이 광주 MBC와 KBS에 불을 질러 불만을 표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힌츠페터는 당시에 “너무 슬퍼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기록했다.” 라고 말했는데 아프고 슬퍼도 잊지 말아야 하는 역사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으로 해석해 나에게 크게 다가왔다. 또한 동영상 중 “기자가 기록하지 않고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머릿속에만 기억하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라는 말이 너무 좋았다.


기자의 첫째 임무는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에는 사관이 있었지만, 현재의 사관은 바로 기자이며, 기자의 손으로서 당대역사의 한 장면이 그려지는 것이다.

이로써 국민들에게 바른 정보를 전달해주고, 올바른 가치관과 신념을 세우는 것에 도움을 준다. 이것이 기자의 무거운 책임감이라고 생각하며, 힌츠페터가 이 일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자신의 나라가 아닌 아시아에 속해 있는 다른 나라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시민군의 이야기를 듣고, 당시의 참혹한 현장을 영상과 글로 남겨 현재까지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우리가 힌츠페터의 영상을 보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세워 진실을 마주하는 것과 같이 힌츠페터는 기자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 했다고 생각하여 힌츠페터를 존경하게 되었다.

  

내가 평화나비 콘서트를 갔을 때 받은 팔찌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Your memory makes justice."

이 문구를 보았을 때 나는 법을 배워 정의를 실현하고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참된 기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 그 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


  우연히 나는  5.18기념재단이 써낸 『그 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민주화운동이 얼마나 참혹하고 무차별하게 진행되었는지를 말하고 있으며, 잔인한 방법으로 시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는 두 가지 해답을 내놓는다.

  

첫째로는, 망각의 해법이다.

망각의 다른 말은 ‘잊음’ 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말이 있듯이 어떤 과거나 역사에서도 망각은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망각’이라는 말에 그쳤지만 나는 여기에 망각의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이를 ‘무관심’ 이라고도 부르고 싶었다. 현재에 무관심한 민족에겐 매래도, 과거도 없다. 요즘 대두되고 있는 세월호, 탄핵, 위안부 등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사건을 마주하고 있으며, 이에 우리가 무관심한다면 후에 무관심은 망각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과거를 청산하는 두 번째 방법은 ‘기억’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기억함으로서 진실을 응시하고 과거를 청산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와 역사에 대해 기억하고, 진실과 마주함으로써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도 진실을 앎으로써 기억하고 이를 되풀이 되지 않게 해야 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사실을 알고 진실을 파헤침으로써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 또한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과거 민주주의를 향해 싸웠던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아까와 같이 ‘기억’에 한 가지 의미를 더 부여하고 싶은데 이는 ‘문제의식’ 이다.

부끄러운 과거에 문제의식을 느껴 반성하고 성찰해야 되며, 자랑스러운 과거에는 존경심을 길러 배울 점을 찾아 실천해야 될 것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과거에 치중하고, 좋은 과거만 배우는 것이 아닌 부끄러운 과거도 배우고 이에 반성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재 역사교과서에는 박정희, 전두환 등 10.26 사태, 5.18 운동 등에 관한 이야기는 한 페이지가 넘지 않을 정도로 분량이 적다. 또한 베트남 파병때 우리군사들이 베트남여자들을 성노예화시킨 사실은 그 어느 교과서에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의 좋은 과거를 배워 선인들을 자세를 익히는 것도 좋지만 5.18같은 이야기를 자세하게 배우지 못한다면 이는 좋은 역사의식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으로 확장시켜나갔다.

이처럼 우리는 잘못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며, 잘못된 것을 바로 알고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 날들에 희생된 억울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 역사란 무엇인가 >

  

5.18 광주를 마주하며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역사를 무엇인가?’

누군가는 ‘흘러가는 것‘ 이라고 답했다. 나에겐 역사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내가, 너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 역사이며, 역사는 선택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역사를 개인의 역사와 공동의 역사로 나눴다.

  

개인의 역사는 말 그대로 내가 밥을 먹는 것, 누군가를 만나는 것, 숨을 쉬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나의 역사이며, 내 역사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나 또한 그들의 역사 속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공동의 역사를 풀어 설명하자면 위인전 같은 개념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고, 명성황후가 시해되었으며,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온 것이 공동의 역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교집합이 있다. 나 개인이 유명해지고 큰일을 하게 된다면 공동의 역사로 역사책이나 신문에 기록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유명해졌다고 개인의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역사와 공동의 역사는 교집합이며, 상호관계이며, 무엇으로도 그 둘을 딱 잘라 나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교집합 안에는 개인이 모여 선택을 하고 사회, 공동, 국가의 역사가 된다. 이 정의는 그 누구의 정의도 아니며, 정확한 정의도 아니다.

그저 나만의 정의일 뿐이며, 이는 언제든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왜곡된 역사‘ 도 있다. 예를 들어 심사임당은 현모이긴 하나, 양처가 아니었던 것처럼.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열 두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영웅 김구는 어렸을 적부터 난폭했고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사도 많지만, 잘못 알고 있는 역사도 많다.

  

이 ’왜곡된 역사‘ 라는 것이 사실과 진실이 아닌 우리의 마음대로 선택한 역사이며, 선택된 역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같은 사실을 두고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그 둘 중에 선택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와전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문득 우리의 역사는 인간의 해설에 따라 주관적인 견해가 섞인 이야기는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역사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해야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역사교육의 입장에서 교육과 세뇌에 대한 차이점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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