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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Mar 15. 2024

볼보 S90과 올드카

현대차 전시장에서 제네시스 G80 탑승 이후 나의 자동차 감각에 이상이 발생했다. 차는 그냥 차라고만 생각했었는데 프리미엄을 추구하는 차량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에 빠져버린 것이다. 하긴 나의 첫 차이자 지금도 애용 중인 2013년 출고 올란도는 열쇠를 돌려 시동을 걸고 핸드 브레이크를 당겨 주차하는 올드카이다.


헤드라이트는 손으로 일일이 돌려 껐다 켜야 하고 가죽 시트도 아니며, 통풍시트는 물론 없고 트렁크는 터프하게 손바닥으로 눌러 닫는다. 이제는 오디오 관련 디스플레이도 나가버려서 오로지 직감과 소리에 의존하여 조작해야만 한다. 가장 최신 기능이 크루즈 드라이빙이다. 최신 크루즈처럼 전후좌우 교통상황을 고려해 자동으로 주행을 하지는 않는다. 오로지 정속주행만 가능하다. 까딱하면 앞차와 쾅! 이런 실정이니 신형 G80이 트랜스포머 영화에 나오는 로봇처럼 느껴질 수밖에.


현대자동차 전시장에 다녀온 후 출퇴근용 추가 차량 구입이라는 본래의 취지는 슬그머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반면 기왕 최신 자동차의 강물에 발을 담갔으니 아예 허리까지 넣어보자는 얄궂은 충동이 차올랐다. 그러던 차에 흥미로운 광고가 떴다. 내가 요즘 자동차 검색을 하고 있으니 맞춤형으로 자동차 광고가 연결된 모양이었다. 볼보 매장에서 차량 시승을 신청하면 스타벅스 커피 쿠폰을 준다고 했다. 솔깃한 제안이었다.


현대자동차에서는 시승 운전이 불가했는데 볼보는 직접 차의 속도를 높여볼 수 있고 커피 쿠폰까지 준다니 일석이조 아닌가. 손해 볼 일 없는 이벤트라고 판단했다. 제네시스 G80을 타 보았으니 비슷한 라인업으로 S90을 골랐다. 기왕 타기로 한 거, 고급 라인으로 고.


잠시 뒤 모 대리님이 담당자로 배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곧바로 시승 날짜를 잡았다. 거금의 생활비를 사용하는 만큼 아내와 두 딸까지 모두 함께 갔으면 했다. 내가 시승을 제안하자 아내는 못 내켜하였다. 사지도 않을 차를 뭣하러 온 가족이 함께 줄줄이 총출동하냐는 것이다. 백화점에 꼭 살 게 있어서 가나. 기분전환 겸 갈 수도 있지. 아내는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볼보 강릉 전시장은 새로 지은 건물이라 외관이 매우 깔끔했다. 음, 단정하군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찰나 매장 입구에서 직원 분이 손을 들어 차를 제지했다. 그리고는 빙긋 웃으며 방문 목적을 물어보셨다. 시승 예약을 했다고 하자 키를 두고 차에서 내리면 주차장에 대어 놓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발레파킹, 아주 붐비는 맛집 주차장에서 몇 번 강제로 발레파킹 당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넓고 한가로운 곳에서 대리 주차 서비스를 받은 적은 없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차에서 내렸다.


이후부터는 담당 대리님이 안내를 해주셨다. 매장은 이케아 가구룸 일부를 떼어 놓은 것 같았다. 가구와 쿠션에서 디자인에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등과 카펫도 북유럽 쇼룸처럼 꾸며 놓았다. 대리님은 일단 앉아서 쉬라고 했다. 얼떨결에 자리에 앉자 아이들에게는 주스가, 나와 아내에게는 커피를 나왔다. 특이하게 생긴 스칸디나비아 의자에 앉아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그 사이 대리님이 커다란 스마트 패드를 들고 프레젠테이션에 가까운 차량 설명을 해주었다. 거 참, 나는 그저 시승 한 번 하고 커피 쿠폰이나 받아 가려고 왔는데 극진한 서비스가 계속되어서 솔직히 난감했다. 이렇게까지 정중하게 안내받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않았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는지 대리님 설명을 건성으로 듣지 않고 최대한 예의 바르게 경청하였다. 받은 게 있으니 최소한의 에티켓은 지켜야 한다는 느낌을 공유할 수 있었다.


드디어 시승 시간, S90은 풀옵션 차량이었다. 볼보는 안전한 차라고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반전 매력에 가깝게 내부가 고급스러웠다. 서울의 오디오샵에서나 보던 바워스앤윌킨스 b&w 스피커가 장착되어 있었고, 시트는 인체 구조에 알맞았다. 2열 공간이 굉장히 넓었다. 천장은 선루프 처리가 되어 개방감이 시원했다. 주행감은 말할 것도 없이 묵직하고 차분했다. 돈의 위력이 세구나, 계속 이런 생각이 들었다. 블루투스를 연결해 마룬 파이브 앨범을 들었다. 스피커 출력은 굉장하고 음이 선명했다. 아이들도 나도 아내도 환호했다. 5분 간의 향연은 축제처럼 끝났다. 올란도 lpg 모델을 몰던 나는 비현실적인 감각에 휩싸였다.


곧 우리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조수석에서 끝까지 미소와 배려를 잃지 않은 대리님께 죄송해졌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겨우 커피쿠폰이나 받자고 함부로 이런 이벤트에 신청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면구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소비자의 구매를 기대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의 주변으로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남에게 민폐 끼치는 것에 대하여 매우 몹시 민감한 아내는 갑자기 대리님께 차량 가격을 물어봤다. 나는 순간 불안해졌다. 아내는 이마트에서도 살 제품만 시식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시식한 음식은 반드시 구입한다. 그것이 판매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마 이 사람이!


S90의 차량 가격은 AWD 기준 7400만 원이었다. 아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당할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살 마음이 없었다면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아하하 소리 내어 화제를 돌렸을 것이다. 정말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충동과는 거리가 먼 미니멀리스트 아내가 프리미엄 자동차 구매를 긍정적으로 고려하는 장면을 내 눈앞에서 보다니 다소 혼란스러웠다.


연예시절부터 부부가 된 지금까지 17년 간 지켜본 아내는 헛된 약속을 하지 않았다. 고지식하다고 할 정도로 정직한 사람이다. 나는 덜컥 아내가 그 자리에서 사인을 해 버릴 수도 있게다 싶어서 눈치껏 끼어들었다. 담당 대리님께 구입하게 되면 따로 연락을 드린다고 허리 숙여 인사하고 매장을 슝 빠져나왔다. 발레파킹을 해 주셨던 직원분이 주차장에서 차를 빼 주셨다. 올란도가 자동차 박물관에서 돌아온 듯한 분위기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삐걱, 탁! 운전석 문을 닫자 그리운 느낌이 뭉근히 차올랐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고 돌아온 자동차 같았다. 아내를 바라보았다.


“자기, S90 진짜 사려고? 고급 휘발유 넣어야 되고 연비도 낮아.”

“나쁘지 않던데, 우리가 그 값어치만큼 제대로 즐기면 되잖아.”


어안이 벙벙했다. 아내는 플렉스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월든의 수호자인 아내가 7400만 원짜리 차를 배스킨라빈스 이달의 맛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묵묵히 올란도를 몰았다. 우리가 S90 얘기를 해서 질투가 난 올란도는 분발하고 싶었던지 평소보다 더 힘차게 움직였다. 십일 년 탔어도 주행 성능은 끄떡없었다. 침묵을 지키던 아내가 올란도의 보급용 플라스틱 대시보드를 쓰다듬었다.


“역시 차는 차야. 이십사 시간 중에 두 시간도 안 탈 거면서 칠천만 원을 지불하는 건 지나쳐.”


금욕주의 철학자 아내가 돌아왔다. 우리는 자동차 회사가 내세우는 상품성이라는 것이 사실상 허구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어쩌면 우리는 소비를 했을 때의 짜릿함과 기대감이 만들어내는 도파민에 중독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S90이나 G80을 타면 남에게 좋게 보일 것이라는 과시감이 우리를 소비로 이끈다. 그러나 마약중독자가 계속 투약량을 늘려나가는 것처럼 소비중독 또한 무한정 방치하면 만족도는 떨어지고 비용은 증가하게 된다. 그 대가로 우리는 과도하게 지출하게 된다. 돈을 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이 일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자기 몸을 덜 돌보게 되고, 가족화 함께하는 시간도 희생된다. 우리는 현자처럼 카 인플레이션 현상을 논했다.


그러는 사이 아파트 주차장에서 다다랐다. 주차한 올란도 주변 스무 대 중 절반은 고급차였다. 람보르기니와 벤츠, BMW, 레인지로버가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속이 불편했다. 무조건반사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뭔가 꿀리는 기분. 아내와 나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쿡쿡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방금 전까지 소비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지성인 모드였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흔들리고 말았다.


우리는 속물이었던 것이다. 그래, 속물이지만 그때그때 내가 속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속물이 되자. 이렇게 다짐했다. 절제의 마음은 변덕이 심하다. 그래도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잘 넘기면 괜찮다. 앞으로 사치품 체험 이벤트 같은 건 하지 않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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