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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Mar 13. 2024

아반떼 보러 갔다가 제네시스

강릉에 사는 4인 가구인 우리 가족은 차 한 대로 지내고 있다. 2013년 11월에 출고한 2014년식(차는 신기한 년식 계산법을 가지고 있다) 올란도 lpg 모델이다. 출고 후 만 십 년을 넘긴 2024년 3월 중순 현재, 누적 운행거리가 약 18.5만 킬로미터다.


대중교통이 열악한 지방에 살면서 차 한 대로 잘 버텼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내 덕분이었다. 초등교사인 아내는 2011년 첫 발령 이래로 집에서 도보로 십 분 이내의 학교만 다녔다. 중간에 두 아이를 낳고 5년 가까이 육아휴직을 하는 등 변수가 있었지만, 직주근접의 원칙은 지금까지 이어졌다. 일단 2025년까지는 걸어서 출근 가능한 학교에 근무할 수 있다. 차 한 대로 충분히 지낼 수 있는 것이다.


2024년 올해는 내가 둘째 초등학교 입학에 맞춰 육아휴직을 냈다. 평일에 차를 타던 내가 출근을 하지 않으니 올란도는 주차장에서 푹 쉬고 있다. 매일 아침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던 날들이 꿈만 같이 느껴진다. 주말에 폭설이라도 내려 차를 타지 않으면 배터리가 방전되어 버릴지도 모를 정도다.


차를 타지 않으면 불편할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아이들도 학교를 걸어서 다니고, 첫째가 다니는 유일한 학원인 피아노도 학교 인근이라 자동차로 이동할 일이 없다. 게다가 나는 뚜벅이로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작은 상가에 새로 생긴 빵집이나 식당은 천천히 걷지 않으면 발견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


혼자 뚜벅뚜벅 걸으면 신체 리듬이 단순해진다. 뇌도 깨끗한 물에 담가 건진 것처럼 말끔해진다. 걷는 순간의 평온함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지만 요즘 나는 차량 정보에 굉장한 에너지를 쏟고 있다. 요즘이라고 퉁치기에는 그 기간이 지나치게 오래 지속되고 있다. 너무 지나쳐서 불안정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 괴상한 증상은 차량구입용 적금을 붓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2026년 2월이 되면 우리 가족에게 두 대의 차가 필요해진다. 아내의 집 앞 학교 근무가 4년을 채워 만기가 된다. 아무리 가까운 학교라도 걸어서 최소 삼십 분은 걸린다. 도보 출근은 무리다. 아침에 식사도 하고, 아이들까지 챙기려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강릉에는 지하철이 없고, 버스 노선도 촘촘하지 않고, 전동 킥보드는 말도 안 된다. 그래서 큰 결심을 했다. 적당한 시기에 두 번째 차를 사자고.


자동차를 좋아하는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무려 십수 년 만에 새 차를 사는 것이 아닌가. 지나치게 들뜬 나머지 나는 신차 적금이 엄청난 번민을 불러일으키리라는 것을 예상치 못했다. 그냥 차 한 대 사는데 무슨 번민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큰돈을 쓰는데 신중하다. 그리고 우리 집 경제 정책은 특수성이 있다. 나와 아내는 체크카드만 사용하며, 일시불을 선호한다. 목돈이 드는 소비는 계획을 세운다. 즉 우리의 저축은 진짜 해당 물건을 사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차 구입 또한 후회 없는 선택을 해야 했다.


급할 건 없었다. 어차피 차를 사려면 일 년 이상 남았으니 차곡차곡 저축하면서 이런저런 차를 살펴보자고 마음먹었다. 출퇴근용으로 무난한 자동차면 괜찮으니까. 진실로 괜찮으리라고 생각했다. 근데 마음이 이상했다. 사춘기의 성난 충동처럼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차의 세계는 앨리스가 다녀온 지하 토끼굴만큼이나 매혹적이고 위험한 곳이었다.


아반떼 사러 갔다가 제네시스 보고 온다는 소문은 허언이 아니었다. 자동차 카페와 블로그를 들락거리고 있노라면 하루에도 수십 번 심박수가 오르내렸다. 세상에 좋은 차는 많았고, 온갖 자동차를 사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가족을 위한 안전, 벨벳 같은 승차감, 끝내주는 가속력, 성공을 대변하는 하차감.


자동차의 세계는 각종 프리미엄을 앞세워 소비자를 현혹하고 있었다. 자동차는 곧 자신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도 상당했다. 차를 아바타이자, 현실의 자신보다 더 소중한 자아 그 자체로 인식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확신에 가득 찬 자동차 카페 게시물을 읽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왜곡된 자동차 프리미엄의 미로 속으로 빠져들었다. 인생 뭐 있어, 돈 벌면 멋진 차 타고 다니는 거지!


천만 원 단위가 우습게 느껴졌다. 이따금 이성이 돌아와도 금방 판단력이 무뎌졌다. 어어 하는 사이 눈높이가 계속 올라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동차는 단일 가격제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같은 소나타라고 해도 N 라인의 풀옵션은 4500만 원에 달하지만 2.0 가솔린 트림의 노옵션은 2800만 원이다. 트림과 옵션에 따라 무려 1700만 원이 차이 나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소나타 상위 세단 차량인 그렌져 2.5 가솔린 트림 노옵션이 3743만 원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자동차 판매 마케팅의 정수가 여기에 있었다.


밴다이어그램의 교집합 부분처럼 모든 차량은 상위 등급 차량과 가격이 겹치는 구간이 존재했다. 좋게 말하면 소비자 선택의 폭이 넓다. 그러나 다른 각도로 바라보면 영악한 판매 전략이다. 구매자의 허영심과 인지적 혼동을 이용해 ‘기왕이면 다음 단계로 가시죠’ 같은 악마의 속삭임을 거부하기 어려운 구조다. 아반떼 고급 트림 살피다 보면 쏘나타가 시야에 들어온다. 쏘나타에 옵션을 좀 넣다 보면 어느새 그렌져가 불쑥 끼어든다. 그리고 잠시 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제네시스 g80 운전석에 앉아있다. 더불어 g80을 사도 되는 근거까지 합리적으로 구상 중인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한 번 사면 적어도 십 년 이상 타니까, 앞으로 소득이 찔끔찔끔 오를 테니까, 평생 차 많이 사 봤자 네다섯 대인데 관짝에 돈 싸 들고 가지 않으니까, 타이거 우즈도 구할만큼 튼튼하다고 하니까 등등. 평소에는 뻑뻑하게 굳어있던 두뇌가 챗GPT처럼 팽팽 돌아갔다. 나의 지능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현대자동차 판매점에서 생생히 실감했다.


카 마스터님이 카탈로그를 주시며 할부 이자가 나쁘지 않다고 운을 띄웠다. 요새 누가 현금 박치기로 차를 사냐는 상냥한 미소에 나는 정말이지 g80 계약서에 사인할 뻔했다. 천사의 날개를 닮은 제네시스 로고가 박힌 핸들을 돌리며 운전하면 참 하루하루가 나이스 할 것 같았다. 대리점 밖 대로변을 따라 제네시스 몇 대가 유유히 지나갔다. 나도 제네시스 멤버 중 일부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대리점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새하얀 전등에 반사되어 흡사 유령 같았다. 차 할부금을 갚느라 영혼과 시간과 이자를 빼앗기는 유령.


나는 고개를 흔들며 현대자동차 전시장을 나왔다. 계속 거기에 있다가는 휘둘릴 것이 분명했다. 자동차의 세계는 정말이지 무서웠다. 그런데 정말로 차를 사야만 하는 시기에 도달했고, 늦어도 일 년 반 안에는 반드시 구매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무겁게 다가온다. 한동안 자동차에 전율하고 한편으로 시달리며 살게 될 것 같다. 부릉부릉, 그게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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