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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Jul 22. 2024

근사한 방학이 필요해

나눗쌤 7월

다소 과격한 어감이 있지만, 교사가 미칠 때쯤 방학을 하고 학부모가 미칠 때쯤 개학을 한다는 말이 있다. 유명한 '학교 속담' 중 하나다. 실제로 7월 중순의 학교는 좀비 소굴을 떠올리게 한다. 피부가 푸석푸석해진 교사들이 좀비처럼 "방학시익~ 방하악식"을 되내며 학교를 돌아다닌다.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 으레 그렇듯 교사는 감정 소모가 심하다. 혼자서 다수의 학생을 책임지고, 학부모와 외부 인사를 상대하느라 신경이 곤두서있기 일쑤다. 과열된 기계는 운행률을 낮춰 고장을 예방해야 한다. 교사에게도 방학이 필요한 이유다.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교사의 이직률이 치솟아 공교육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열정과 체력은 제한적이다.


나는 여름 방학이 최소 4주는 확보되기를 바란다. 짧은 방학을 보낸 뒤 일찍 종업식을 하자는 분도 계시지만, 나는 체력 관리를 위하여 자주 쉬는 편이 좋다. 물론 일개 교사의 바람에 따라 학사일정이 정해지지는 않는다. 운이 따르길 바랄 뿐이다.


학교 뒤편의 하조대 해변, 방학 때가 아니면 천천히 걸어보기가 힘들다.


방학을 즐기는 방법에는 여러 방식이 있겠지만 나는 조금 특이한 루틴이 하나 있다. 학교 인근의 내가 좋아하는 음식점을 일반인 모드로 이용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회식으로 방문한 식당에서는 제대로 음식 맛을 느끼기 힘들다. 나는 음식을 천천히 먹으며 책을 읽거나 딴생각을 하는 편인데 회식 자리에서는 그럴 수 없다. 물컵을 돌리고, 수저를 놓고, 밑반찬이 떨어지면 벨을 눌러야 한다.


다들 돼지갈비를 시키는데 나 혼자 삼겹살을 따로 시킬 수는 없다. 대놓고 타박하는 분은 계시지 않겠지만, 사회생활에서 눈치는 필수다. 인생의 난이도를 자발적으로 높이고 싶지 않다. 학교 구성원 중에서 나이대가 어리면 할 일은 더 늘어난다. 테이블마다 음료수도 돌려야 하고,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스몰 토크를 틈틈이 나눠야 한다. 회식은 엄연히 업무의 연장선이며 직장 생활이다. 적어도 내게는.


우리 학교 주변에도 유명한 식당이 있다. 작년에 담임을 맡았던 아이의 할머니와 부모님이 운영하는 횟집이다. 양양 기사문항에서는 이름 있는 곳이다. 나는 물회에 열광한다. 평소에도 회를 먹기 위하여 횟집에 가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개 회덮밥이나 물회를 먹으러 들른다. 회는 훌륭한 반찬이지만 회만 먹는 건 과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에 발령받기 전부터 '00 횟집'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반 M네 가게라는 점을 알고 사실 많이 좌절했다. 현직 담임이 가게에서 밥을 먹으면 학부모님이 몹시 부담스러울 것이다. 상담 기간도 아닌데 밥 먹으러 가서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기도 좀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작년 한 해 동안 물회를 먹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인고의 시간 끝에 한 해가 지났다. 나는 더 이상 아이의 평가권자가 아니며, 동학년 선생님도 아니고, 심지어 전담 수업도 없었다. 이해관계가 겹치지 않는 완전히 홀가분한 관계가 된 것이다. 나는 무명의 손님이 되어 느긋하게 물회가 먹고 싶었다. 갑갑한 출근용 복장을 한 채 회식 모드로 사교용 웃음을 짓지 않는 진짜 손님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차림새인 오버핏 면티셔츠에 버뮤다팬츠를 입고 갔다. 식당의 규모가 커서 조용히 쥐도 새도 모르게 다녀오면 흔적이 남지 않을 것 같았다.


맛있는 점심을 혼자 먹을 수는 없어 4인 가구가 총출동했다. 주말에 두 아이와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는 평범한 아저씨가 된 나는 안쪽 룸으로 향했다.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물회와 회덮밥을 시켰다. 과연 식당은 손님으로 북적였다. 익명성을 유지하기에 최적화된 환경이었다. 종업원과 손님이 분주하게 오가는 통에 학부모님과 직접 마주하지 않을 수 있었다.


물회는 예상을 뛰어넘는 상큼함으로 나를 기쁘게 했다. 나는 소면을 말아 두툼한 회와 함께 먹었다. 신선한 생선은 탄력 있고 향긋하다. 00 횟집에서는 배를 띄워 바다에서 직접 고기를 잡는다. M은 자신이 매일 먹는 식사가 얼마나 양질의 밥상인지 알고 있을까. 나는 제자를 부러워하면 한입한입 소중히 먹었다. 계산을 마치는 순간까지 학부모님께 들키지 않았다. 스릴 만점 물회였다.


양양 시골길의 여름 밤하늘. 방학 때 누릴 수 있는 호사다.


나는 방학을 잘 보낸 선생님이 좋은 수업을 한다고 믿는다. 교사가 몸으로 겪은 것들은 모두 배움과 가르침의 재료가 된다. 해변에서 플로깅을 해 본 선생님은 바다로 흘러들어오는 쓰레기가 얼마나 많은지 절절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경주를 유튜브로 만나는 것과 첨성대 주변을 돌며 돌의 개수를 세어보는 경험은 다르다. 불국사 청운교를 오르고, 석굴암 깊숙이 들어 갔다 온 선생님의 수업은 눈빛부터 차이가 날 것이다. 훌륭한 물회가 먹고 싶어서 ‘학부모가 운영하는 맛집’에 잠입하는 철딱서니 없는 짓도 방학 중이니 시도할 여유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때때로 교사의 방학 생활을 두고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만난다. 아이들이 없어도 학교에 출근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의견도 있다. 내가 보기에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이다. “학기 중에 연가도 제대로 못 쓰는 담임은 언제 쉽니까?” 같은 휴식 복지 차원으로 항변하고자 함이 아니다. 잘 쉬는 것도 물론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방학은 교사가 자발적으로 삶을 업그레이드 하는 귀중한 기간이다.      


선생님이 사비를 들여 여행을 다니고, 책과 영화를 접하고, 운동한다. 풀뿌리 교사 레벨 강화. 이보다 멋진 상황이 어디 있는가. 국가 차원에서도 장려할 만하지 않은가. 방학 제도가 이토록 오랜 기간 존속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순기능’이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7, 8월은 신비로운 계절이다. 식물은 터질 듯이 왕성한 생명력을 뽐내고 태양은 뜨겁다. 근사하게 여름 방학을 보낸 교사는 교실로 돌아올 힘을 얻는다. 두 아이를 돌봐야 하는 아빠이자 교사인 나는 조금 피곤할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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