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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Oct 07. 2024

붓다 드라이브

낡은 올란도 대시보드 왼쪽 구석에 국보를 모셨다. 미니어처로 제작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검지보다도 작은 크기로 제작된 아담한 사이즈다. 시야 확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안쪽에 붙여두었다. 미륵보살을 차 안에 모신 이유는 자명하다. 운전하면서 마인드컨트롤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도로 위의 세계는 살벌하다. 그리고 무수한 경우의 수로 운전자를 분노와 좌절감에 빠지게 한다. 산책과 명상으로 이룬 고요함이 순식간에 흩어진다. 도로 위에서는 십 년 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다. 그리하여 신호대기 순간만이라도 심호흡하며 평정을 되찾을 수 있게 반가사유상을 설치했다. 


나는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며 즐겁게 운전하고 싶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나도 쾌적한 운전 말이다. 나는 이러한 운전을 ‘붓다 드라이브’라고 부른다. 붓다 드라이브는 예방과 대응 두 가지 측면으로 나뉜다. 예방은 최대한 양보 운전을 하는 것이다. 끼어드는 차 있으면 엑셀에서 발 떼고 보내주고, 꼬리물기 하지 않는다. 그리고 속도 욕심이 나지 않게 가급적 2차선으로 다닌다. 양보 운전만 잘해도 예민한 상황이 발생할 확률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그렇지만 도로가 어디 하하 호호 정다운 꽃동산은 아니지 않은가. 가만히 있어도 두 줄짜리 중앙선을 넘어온 대형 SUV가 차 옆면을 박을 수도 있다(실제로 2023년 가을에 내게 벌어졌던 일). 교통사고처럼 극단적인 일이 아니더라도 고통스러운 경험은 너무나도 자주 발생한다. 


선량한 성품과 고운 입을 가진 사람이라도 절로 욕을 내뱉게 되는 장소가 도로다. 붓다 드라이버로서 대응 원칙은 하나다.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아무도 다치거나 어느 차도 파손되지 않았다면 너그러이 넘기자는 것이다. 상대방 처지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여기면서. 물론 쉽게 되는 일은 아니다. 그래도 원칙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 차이다. 욕을 할 때 하더라도 금방 성난 마음의 찌꺼기가 사라진다. 유사한 상황이 다시 반복되었을 때 덜 화가 나기도 하고. 


오늘도 미륵보살을 지긋이 바라보며 시동을 걸었다. 온 도로에 자비를, 아니 짧은 도로 위에서라도 운전자들에게 자비를. 시청에 들러 잠깐 은행 업무를 보고 송정 해안숲으로 향했다. 나는 남항진에서부터 주문진까지 이어진 소나무 숲을 무척 좋아한다. 소나무 그늘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시간은 아무리 반복되어도 질리지 않는다. 나는 송정 바다 쉼터 앞에 있는 큰 주차장에 주로 차를 댄다. 이차선 도로만 건너면 바로 숲이 나오고 화장실이 가까워 산책의 시작점으로 적합하다. 송정 주차장 부지는 제법 넓은데도 차량이 꽤 많다. 주말은 당연히 만차고, 평일 오전조차 절반 이상이 채워져 있다. 관광객도 많지만 주기적으로 출근하듯 오시는 어르신의 수도 상당하다. 


송정 주차장은 입구와 출구가 구분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의 지점을 한 차선씩 나누어 출구와 입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출구와 입구가 오십 미터 가량 떨어져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입구에는 입구임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이, 출구에는 출구임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이 전면을 차지한다. 주차장 중간에는 출구를 가리키는 대형 방향 지시판도 선명하게 붙어 있다.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고 큰 메시지가 군데군데 존재하는 셈이다. 나는 이곳에서 접촉 사고를 낼 뻔하였다. 

최근 신라모노그램 리조트 공사로 인해 솔숲 도로는 조금 어수선하다. 트럭을 비롯한 공사 관계 차량이 무시로 다닌다. 도로에 접한 리조트 외부에서는 조명이나 외벽을 설치하는지 공사 인부가 도로 한편을 차지하고 작업을 한다. 그래서 신호수의 수신호를 따라 기다렸다가 한쪽 차선씩 움직인다. 그 결과 차들이 앞뒤로 늘어서게 된다. 


오늘 역시 기차처럼 옹기종기 붙은 차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송정 주차장이 나왔다. 나의 목적지였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내 차 바로 뒤에 중형 트럭이 따라오고 있어 약간 부담스러웠던 차였다. 항상 그래왔듯 입구에서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아니, 자동차의 절반 가량이 입구를 지나치려던 찰나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이십 년 전 내가 고등학생 때 출시된 구형 소나타 한 대가 정면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급히 정차하느라 트럭도 깜짝 놀랐는지 빠앙! 하고 경적을 울렸다. 나는 그저 입구에 들어섰을 뿐인데 앞에서는 이글거리는 불꽃 눈빛을 쏘는 할아버지의 소나타가 등장했고, 뒤에서는 트럭이 고함을 질러댔다. 소나타 할아버지는 유리창 안에서 삿대질을 하며 나를 질타했다. 차 유리 탓에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왜 길을 막고 난리냐는 모션이었다. 입구 바로 옆에 바짝 붙여 주차한 차들 때문에 우회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비상등을 켜고 후진했다. 소나타 할아버지는 ‘으이구, 내가 이번만은 넘어가주지만 다음에 또 그러면 가만 안 둔다’는 맹렬한 기세로 전진해 왔다. 한 치의 죄책감도 없는 순도 100%의 정당함이 실려있었다. 


어쩐지 기세에 눌린 나는 입구 진입을 포기했다. 여기서 무슨 수로 할아버지께 도로 규칙과 운전자의 매너를 말씀드린단 말인가. 


‘나도 나이가 들면 입구와 출구를 헷갈릴 수도 있어. 부딪히지 않았으니 됐다.’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 자동차 바퀴 방향을 돌렸다. 햇빛에 반사된 미륵반가사유상이 일순 반짝였다. ‘붓다 드라이브 포인트 플러스 원’이라는 효과음이 들린 것만 같았다. 내 뒤에는 여전히 차들이 늘어져 있었다. 급한 마음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차를 몰았다.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출구가 눈에 들어왔다. 입구와 출구는 같은 도로에 같은 방향으로 접해있다. 나는 출구로 핸들을 꺾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브레이크를 꾸욱 밟아야 했다. 내 앞에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일그러진 렉스턴 한 대가 서 있었다. 상대의 운전석 창문이 열려있어 눈빛이 여과 없이 옮겨왔다. 뭐 이런 XX가 다 있어!


나는 급한 대로 쌍깜빡이를 켜고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죄송한 마음을 담아 고개도 꾸벅 숙였다. 나는 무개념 드라이버였다. 나는 입구의 소나타 할아버지와 다르지 않은 짓을 해버렸던 것이다. 주차선 따로 없이 공터 방식으로 운영되는 무료 공영주차장이니 눈치껏 운전하는 것이 일반화된 곳이라고는 하나 원칙적으로는 크게 돌아 다시 입구로 들어가는 편이 맞았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편법을 해도 되는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멀리 바다에서 날아온 물빛이 미륵반가사유상에 와닿았다. 붓다 드라이브 포인트 마이너스 원, 이라는 효과음이 들린 것만 같았다. 


                     

주차장 출구는 이런 느낌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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