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부터 청소기의 빨간 경고등이 꺼지지 않았다. 필터 점검, 내부 필터에 먼지가 쌓이면 뜨는 경고등이었다. 희미한 붉은색 빛이 새어 나오는 그 경고등은 우리 집 청소기의 유일한 상태 알림 장치였다. 지금껏 경고등이 켜지면 필터를 청소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본체 뚜껑을 열면 분리할 수 있는 필터가 세 가지 나왔다. 파란색 스펀지 필터와 촘촘한 미세 그물망 필터, 마지막으로 자동차 에어컨 필터처럼 생긴 섬유질 필터.
청소는 어렵지 않았다. 스펀지 필터와 그물망 필터는 물로 세척하고, 섬유질 필터는 탁탁 털어 먼지를 떨어뜨렸다. 섬유질 필터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면 작은 모래 먼지구름 같은 것이 일어났다. 나는 단순한 필터 관리법을 지키며 청소기를 십 년 넘게 사용했다.
와인색 삼성 유선 청소기는 교직원공제회에서 결혼 선물로 받은 제품이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교직원 공제회에 혼인하였음을 증명하는 서류를 보내면 세 가지 선물 중 하나를 줬다. 내 기억에는 그릇 세트, 전자레인지, 청소기였던 것 같다. 아내도 나와 같이 공제회 회원이었으므로 선물을 선택할 수 있었다. 우리 부부의 단출한 신혼 가전 중 청소기와 전자레인지는 교직원공제회가 마련해준 것이다(두 번 결혼하면 두 번 선물을 준다는 매우 합리적인 조항도 있다). 만 스물여섯, 일곱에 결혼한 우리에게는 귀중한 자산이었다.
삼성 유선 청소기는 스물두 평 복도식 아파트 신혼집의 먼지를 슉슉 잘 빨아들였다. 삼 년 뒤 둘째가 태어나며 옮긴 스물여섯 평 전셋집에서도 제 성능을 발휘했다. 그리고 오 년이 흘러 마련한 우리 집의 바닥도 씩씩하게 책임져 주었다. 비록 선이 짧아 중간에 코드를 뺐다 꽂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유선 전기 모터의 강력함만큼은 확실했다. 그러다 재작년에 첫 번째 고비를 맞았다. 호스가 뚝 끊어져 버린 것이다. 박스 테이프로 둘둘 감아 응급처치하였으나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절단된 호스 틈새로 공기가 비명을 지르며 새어 나왔다.
나는 트렁크에 청소기를 싣고 급히 응급실, 아니 삼성 서비스센터로 갔다. 이미 출시 후 5년이 넘은 상태라 같은 호스 부품 재고는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부품 의무수급 기간은 겨우 오 년이었던 것이다(그럼 굳이 고급 모델을 살 필요가 없지 않나?). 그래도 전통의 삼성답게 수리 기사님의 눈썰미가 살아있었다. 구멍 크기를 자로 재어보시더니 호환되는 녀석이 있을 것 같다면서 구석에서 부드러운 검은색 호스를 가지고 오셨다. 한눈에 보기에도 입구 모양이 똑같았다. 호스는 매우 부드럽게 잘 작동했다. 나는 창조력을 발휘한 기사회생 서비스에 감동하였다. 그날의 청소기 수리 경험은 훗날 노트북을 살 때 맥북 프로 대신 갤럭시북 프로를 고르는 결과로 이어졌다.
죽음의 문턱에서 되살아난 청소기는 이 년을 더 버텨주었다. 하지만 이번 상황은 조금 심각했다. 아무리 필터 청소를 해도 경고등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 아내는 모터가 과열되어 불이 나면 어쩌냐고 걱정했다. 청소기는 자신의 영혼을 갈아 넣어 먼지 흡입을 이어가고 있었다. 근성의 삼성 수리 기사님도 이번만큼은 희망의 메시지를 들려주지 못했다.
“십 년이 지났으니까요. 필터 재고도 없고, 호환되는 것도 없어요. 정 안 되면 에어건으로 세게 불어서 먼지를 빼내어 보세요.”
그건 이미 해 봤어요, 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네 알겠습니다.” 하고 말았다. 서비스 비용은 청구되지 않았다. 부품을 교체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내부를 열어 간단한 정비를 해줬는데도 무료였다. 대기업의 제품값에는 서비스 비용이 미리 청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대기업 제품을 샀으면 약간 이상하다고 버리지 말고 최대한 고쳐 써야 한다. 방문 기사님을 모시건, 센터에 찾아가건 물건의 수명을 늘릴 수 있는 시스템을 적극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기업은 소비자가 요구해야만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아무도 고치지 않고 버리려 들면 수리 체계는 전문화되지 않을 것이다. 부품 재고도 충분히 구비 해두지 않고.
나는 부상당한 전우를 어깨에 메고 귀환하는 병사처럼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왔다. 오른손에는 본체가 왼손에는 청소기 핸들이 들려있었다. 이 청소기는 대학 간다고 고향을 떠나온 이후 처음으로 사용한 전기 청소기였다. 결혼하기 전까지 자취방 청소는 고전적인 도구로 해결했다. 빗자루와 쓰레받기 그리고 물걸레. 그런 형편이었으니 나의 성인기 최초의 전기 청소기에 애정이 깊을 수밖에.
불살생계(不殺生戒), 생명이 있는 것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계율이다. 지극히 옳은 계율이나 산업 시대에 살고 있는 나는 이 개념을 확장하고 싶다. 플라스틱과 금속으로 만든 물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만드는 재료와 에너지는 자연으로부터 나온다. 석유를 시추하려면 지하 깊숙이 관을 꽂아야 하고, 광물을 캐려면 숲이나 들판을 갈아엎고 암석 덩어리를 부수어 들추어야 한다. 화석연료와 우라늄으로 만드는 전기는 말할 것도 없다. 친환경 풍력발전이라 해도 거대한 바람개비 발전기를 만들고 전선을 연결하면서 자연환경을 어쩔 수 없이 파괴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생물과 비 생물은 서로 연결된다. 직접적으로 생물을 죽이지 않더라도, 서식지를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살생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피를 뚝뚝 흘리지 않는다고 해서 기계와 각종 화생물학적 조작으로 만든 물건을 쉽게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동물병원에 다친 강아지를 안고 가는 마음으로 필터를 갈아 끼우고, 납땜해야 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문제 해결이 안 된 상태로 가지고 온 청소기로 거실을 치우고 있자니 괴롭다. 시뻘건 경고등이 들어온 채 돌아가는 거친 모터 소리를 들으니 노인을 학대하는 것만 같다. 일단은 에어건으로 안쪽 필터를 좀 털어주어야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초반에 필터를 미리 사 두는 건데, 이럴 줄은 몰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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