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의 생일에는 미역국을 구경하기 어렵다. 끓이기 쉬운 국이지만 주부가 자기 생일에 먹겠다고 스스로 끓이지 않는 이상 맛있는 미역국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어제 내 생일에 드디어 맛있는 들깨표고미역국을 딸에게서 얻어먹는 감격을 맛보았다. 맛있는 소스를 얹은 채소찜과 코코넛크림을 얹은 비건딸기케이크 그리고 파스텔 톤의 꽃다발까지 소소한 즐거움으로 함께 보낸 생일이었다.
진행병이 있는 딸은 엄마를 위해 가족들이 그동안 하고 싶은 얘기를 하라면서 자신부터 시작했다. 집안의 중심이 되어 자신을 잘 도와주는 엄마가 고맙다고 하고 다른 가족에게도 한 마디씩 하라고 했다. 둘째 역시 엄마가 있어서 집안이 화목한 것 같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남편은 처음 만났을 때 천사인 줄 알았던 내가 이제는 점 하나 빼니 전사가 되었다고 우스개를 하면서 "오늘 한 건 했지?"라며 본인의 개그에 가장 즐거워했다.
이십 대의 나를 남편이 천사인 줄 알고 한눈에 반했다고 했는데 이제는 아마존 여전사같이 용맹 무쌍한 여자가 되었다. 부엌문의 잠금장치가 고장 나 언제든지 열리는 시골집에서 혼자 며칠씩 자도 무섭지 않고 거실 앞 데크에 뱀이 꿈틀거려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커다란 지네를 발견하면 얼른 진한 선글라스를 쓰고 집개로 버리는 촌여자가 되었다.
이젠 세상 무서운 게 없지만 사람은 아직 좀 무섭다. 눈이 펄펄 내리는 생일 전날, 당근에 새 가방을 내놓고 안 팔려 가격을 더 내렸더니 채팅이 왔다. 깎아달래서 새 제품이라 안된다고 했는데 몇 천 원 올려 흥정을 해왔다. 눈도 내리고 나가기 망설여져서 답을 안 하고 있었더니 우리 집 근처의 도서관이라고 다시 채팅이 왔다. 안 그래도 저녁 먹은 후에 책 빌리러 나갈까 어쩔까 하던 참이어서 결국 나간다고 했다.
가방을 싸서 큰 가방에 넣어 눈에 맞지 않도록 들고 도서관에 들어갔더니 말쑥한 코트 차림의 내 또래 여자가 당근이냐면서 말을 먼저 붙여왔다. 몇 천 원을 깎아달라기에 나는 학생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지퍼를 열어 속까지 확인시키고 계좌이체로 돈을 받았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사진과 함께 채팅이 왔다. 가방 안 쪽 주머니를 살짝 찢어놓고는 새 제품이 아닌 것 같으니 환불을 해달라고 했다.
형태가 망가질까 봐 쿠션을 넣어서 더스트백에 잘 보관했던 새 제품인데 어제 내 얼굴을 보고 호구인 줄 용케 알고 이런 장난을 해온 것이다. 당연히 화가 났지만 아침부터 기분을 망치기 싫어서 바로 송금을 해주고 가방까지 가지라고 했다. 오늘이 내 생일이라 선물로 드린다니까 축하한다고 복 많이 받으시라며 깍듯하게 인사를 해왔다. 기분이 나빠져서 당근앱을 삭제했다.
당근에서 중고거래하며 겪은 기분 나쁜 경험담을 브런치에서도 읽었지만 내가 당하고 나니 참 기분이 말할 수 없이 나빴다. 고작 삼만 원 남짓하는 돈에 얼굴 봐가며 저런 짓을 하는 사람을 면전에서 대화까지 나눴다는 게 가장 언짢았다.
우리 남편이 나에게 전사라고 했는데 호구라니.. 내가 호구였다니...
딸은 가방 속까지 열어서 확인했으니 환불은 안 된다고 해야 한다며 말해주었다.
교사 시절 학교 체육대회를 하면서 학급의 단체티를 만들 때 등짝에다 '천사 같은 선생님'이라는 문구를 학생들이 써줘서 동료들 보기가 부끄러웠다. 카리스마 있는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나는 매운 맛이 아닌 순한 맛 교사였던 것이다.
여전사와 비슷한 느낌의 아만자(암환자)를 지나면서 이젠 무서울 것 하나 없는 천하무적의 용감하고 씩씩한 전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당근에서 호구라는 걸 인증받고 말았다. 시누이의 지인은 딸이 당근 거래하러 나갔다가 남자를 만나 서로 눈이 맞아 결혼까지 했다는데 나는 이제 당근이 싫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