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인 양곤을 중심으로
원래 계획대로라면 인도네시아 발리에 가려고 했었다. 그 당시 같이 살면서 무척 지나게 지낸 플랫메이트 언니가 인도네시아 발리에 간다고 하길래 동행하기로 했던 것이다. 플랫메이트 언니는 싱가폴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떠날 생각이었고 원래 여행은 혼자 다니는 스타일인데 특별히 동행을 허락 한다고 해서.
출발 2주전 비행기티켓 가격을 확인했을땐 싱가폴 달러로 400달러선이었는데, 언니가 발리 여행을 취소하고 한국에 더 일찍 들어갈 생각이 있다고 해서 예약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언니는 결국 출발 일주일 전에 갈 수 있다고 했지만 그 때는 이미 비행기 티켓 가격이 500달러 이상으로 훌쩍 뛰어오른 때라서, 이렇게 돈이 많이 들어서야 못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지 자체가 너무나 매력적이고 가고 싶은 곳이었다면 선뜻 돈을 지불 했었을 테지만.
그래서 차선책으로, 항상 가고 싶었던 '버마'에 가기로 했다. 왠만큼 동남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사람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미얀마의 원래 이름은 버마이고 1988년에 버마에서 독재정권에 대항해서 대규모의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을 때 나빠진 국제적 위상을 갱신하기 위해서 아마 내가 기억하기로는 독재자들이 신봉하는 점쟁이의 말도 받아들여서 버마에서 미얀마로 이름을 바꿨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버마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지식인들은 버마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를 고수한다.
버마와 나는 인연이 깊은 나라이다. 청소년기에 다녔던 학교에서 태국 메솟(Maesot)이라는 곳으로 현장학습을 다녀왔었다. 정확한 시기는 2007년 1월과 8월 각 2주씩 총 한달을 체재한 곳인데, 태국 메솟이라는 지역은 버마와 국경을 맞닿아 있는 곳이다. 그래서 버마 정부군이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를 한다고 소수민족들, 대표적으로는 카렌족을 많이 박해하면서 살인을 비롯한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데, 태국 메솟까지 사람들이 살려고 넘어오는 곳이다.
그래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난민캠프가 여럿있고, 우리 학교에서는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멜라 난민캠프를 다녀왔다. 그리고 그때 우리의 현장학습을 코칭해주신 버마출신 난민 운동가 마웅저 선생님과 10여년 넘게 인연을 이어오면서, 언젠가 방문하겠다는 소망을 가져왔던 차였다.
마침 마웅저 선생님은 10년 넘게 투쟁끝에 얻어내신 한국에서의 난민자격, 합벅적으로 머물 수 있는 자격을 포기하시고 자국내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고 싶으시다고 버마로 귀향하신 터라 수년만에 직접 찾아뵈기도 할 겸 버마를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여행을 간 당시에 버마는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에, 출발 5일을 앞두고 급하게 인터넷으로 e-visa를 신청 하고(미화로 50불을 지불했고, 신청한 다음날에 승인이 되었다), 평소에 비행기 사고 등에 민감한터라 저가항공을 이용하지 않는데, 가격적인면이 너무 매력적이었던터라 제트스타로 왕복 240 싱가폴 달러인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떠났다.
당시의 나는 스트레스가 쌓일데로 쌓이면 훌쩍 주변국으로 떠나곤 했는데,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항상 여행의 주제였고, 그때도 그런 여행의 하나였다. 그래도 호텔은 미리 싱가폴에서 끊어서 가곤 했는데, 이번 버마 여행에서 양곤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호텔 예약조차 안한 완전한 무계획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다음과 같은 대강의 계획이 있었다.
양곤 도착 -> 야간열차로 만달레이 이동 -> 배타고 바간으로 이동 -> 바간 관광 후 야간열차로 양곤으로 이동해서, 오랜 지인인 마웅저 선생님을 뵙고 가는 여정.
아마 배와 열차로 이동하는 것은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은 선택하지 않을 일정일텐데, 구글 검색으로 서양인들이 여행하는 방식으로 선택한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즉흥적이었기 때문에 운명에 이끌리듯이 여러 현지 사람들을 만났던 흥미로웠던 여정이었다.
<버마 철도역 내부의 풍경>
아침 10시25분 경에 양곤 국제 공항에 내려서는, 택시 기사에게 열차 승강장을 가자고 했다. 공식 지명으로는 양곤 센트럴 스테이션(Yangon Central Railway Station)이라고 한데, 한나라를 대표하는 철도역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낡고 누추했다. 인도 뭄바이 여행에서 봄직한 영국 식민지 풍의 건물이었는데, 검색을 통해 찾아보니까 1877년 대영제국 식민지 시절에 건설되었다가 파괴되었고, 1943년에 일본이 다시 재건한 건물이 아직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했다. 동남아 국가들 중에서도 비교적 많은 발전을 이룬 나라인 태국, 말레이시아 등지에만 다니다가 버마에 오니, 이 나라가 최빈국중에 하나라는 이 한나를 대표하는 역의 모습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철도역을 이용하면서 한가지 불쾌한 일이 있었는데, 택시에서 내린 후에 근처에 상주하고 있는 버마 사람 한 명에게 손짓하더니 내 캐리어 짐을 나르라고 시켰다. 나를 도우려는 선한 의도에서 그러나 싶었는데, 그건 나의 순진한 착각이었을 뿐, 짐을 날랐던 사람이 나에게 팁을 요구했다. 내가 택시비를 깍은 것에 대한 악의가 담긴 보복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여행 가운데서는 사람들이 삶에 여유가 없어서인지 나에게 가격 덤탱이를 시도하려는 사람도 있었고 반면에 낯선 여행객에게 정으로 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철도역에서 오후 4시 바간 도착의 티켓을 구입하고는 출발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던 터라 근처에서 요기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다른 나라 예를 들면 베트남이라면 쌀국수, 태국이라면 똠양꿍 이런식으로 대표적인 음식이 떠오르기 마련인데 버마 하면 어떤 요리가 유명하지 안떠오르지 않은가? 뭘 먹을지 몰라서 결국 근처에 태국 음식점이 있길래 몇번을 먹어서 익숙한 태국식 볶음밥을 시켜먹었다. 태국식 볶음밥은 생 오이를 슬라이드해서 올린 것, 계란 후라이도 하나 올리는게 특징적이다.
가게 주인은 현지인이 아닌 낯선 외국인이 찾아온게 신기한듯이 말을 붙였다. 미얀마에서 보기 드물에 에어컨이 나오고, 세련된 인테리어를 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사장은, 자신이 태국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동남아에는 그렇게 잘사는 나라에 가서 수년간 일해서 돈을 벌고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게를 오픈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가게를 나와서 양곤의 대표적인 절인 파고다를 둘러보고 싶어서 가게를 나왔다. 기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떠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았기 때문이다.
택시를 타고 양곤에 위치한 대표적인 사원의 한 곳인 슐레(Sule) 파고다에 도착했다. 특유의 금으로 장식된 철탑이 특징적인게 버마의 사원들인데, 한비야의 여행기에서 읽었던 구절이 생각난다. 국민들이 저렇게 가난한데 절에 붙어있는 금박들이 인상적이라고. 저 금박을 팔아서 가난한 국민들을 배부르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구절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혼자서 사원을 정처없이 산책하다보니까 이곳저곳에서 현지인이 말을 걸어왔다. '어디에서 왔니?' 하며 제법 유창한 영어로 말이다. 처음에는 다른 여행지에서 겪어 왔듯이 낯선 외국인에 대한 호의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짧게 사원 가이드를 해주고 수익을 올리는 현지 가이드였다. 한 청년은 준수한 외모를 무기로 자신의 미남계(?)를 활용하여 가이드를 제안 하기도 했다. 그러다 '사진을 대신 찍어줄까?'라는 이야기를 하며 한 현지사람이 말을 걸어왔고, 나는 슬슬 혼자 다니는게 지루해주기도 해서 가이드를 해준다는 제안에, 불필요한 돈이 들 것은 알았지만 동의해 보였다.
기억에 나는 가이드 내용들이란 종을 칠 때는 '사두(Saduh)'라고 말을 되네이는데, 모든게 잘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는데, 모든게 잘 되기를 바라면서 종을 치고, 또 종을 친후에 내가 간절하게 기도를 하는 모양새를 보고서는 가이드가 '그동안 살면서 스트레스 받은게 많은 모양이구나'라고 혼잣말을 했다. 각 기도처를 알려주어서 불상에 물을 끼얹는다던가 돌을 만지고, 부처님 머리에 부채질을 했던 것들이 기억에 난다. 한국의 에밀레 종은 아이를 넣어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한국 사람들에게 몇차례곤 들었던 이야기라고 말해주었다.
한국의 정치계 혹은 경제계의 고위인사가 방문했는지, 가이드를 무장하고는 사원을 산책하는 모습을 보라고 손짓하기도 했다. 가끔 있는 일인듯했는데, 한국의 고위인사는 성접대용으로 보이는 현지인 여성들을 몇명 대동한 모습이었고, 현지인 여성들은 천진한 얼굴을 하고는 자기들끼리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 외에 여러가지 사원에 대한 설명들을 들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언제나 모든 여행에서 그래왔듯이 사원 가이드를 해준 사람의 개인 스토리이다. 40대쯤 되었을까, 풋풋한 젊음의 싱그러움은 없지만 그렇다고 젊음이 아주 사라지지도 않은 어느정도 원숙함이 엿보이는 그는, 자신이 사원의 가이드로써 5년째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5년째 많은 여행객들을 만나와서 각국 여행객들의 특징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나를 처음 보았을 때는 내 얼굴 생김새가 일본 여행객인줄 알았다고 했다. 내 얼굴 생김새에서 눈코입이 오목조목 모여있는 것과 얼굴의 옆선이 일본 사람과 닮았다고 했다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러저러한 얼굴 생김이 한국 사람이구나 라는 이야기를 했다. 일본 사람 닮았다는 이야기는 자주 듣게 되는 이야기인데, 어느 한 나라와 지대한 영향을 가지게 되면 자연스레 외견에서도 표출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가이드를 해준 분에게 내가 받았던 인상은, 5년간 사원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면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 고뇌한게 전해져왔다. 좀더 다른 표현으로 설명해 본다면 제3의 영혼이 눈이 떠져있는 사람이랄까.
그리고 나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해주기를 내가 지금까지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살아왔고 서양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을 자신에게 말해주었는데, 원하는대로 서양에서 한번 살아보라고. 자신도 호주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을 한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서는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지금 당장, 수년내는 아니겠지만 '너는 서양사람과 결혼하게 될 것이야'라고 예언해보였다. 자신은 아주 좋은 예지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이면서.
아마 못사는 나라 사람이라고 아랫사람으로 대하는 모습이 아니라 평등한 한 사람으로써 대하는 태도가 서양적인 마인드라고 생각해서 그러한듯했다.
인상깊은 만남이라는 생각에 페이스북 친구를 신청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친구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행자들의 만남과 이별에는 기약이 없다는 것, 한번 스쳐간 인연에 대해서 미련을 두지 않는 달관한 자의 태도 같이 여기기로 했다. 그리고 전생에 이 가이드가 이 사원에서 수행하던 스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예정된 기차를 타기위해 택시를 타러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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