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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줴줴글로벌 Jun 14. 2020

나의 미얀마 (버마) 이야기 2

만달레이-바간-양곤 육로 여행기




기차를 타고 바간(Bagan)으로 떠나려던 계획은 어이없게도 열차를 놓치게 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보통 기차를 타면 새 열차가 들어오고 방송으로 바간행 열차라고, 곧 떠나게 된다고 방송을 해주지 않는가? 하지만 나의 상식은 빗나갔고 알고보니 한 시간 넘게 줄곧 정차되어 있던 열차가 바간행 기차였었고, 방송 역시 아마 있었을지 모르지만 미얀마어로만 방송되어져서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기차표를 구입했던 곳에서 승무원에게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승무원은 몇십년은 줄곧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해왔던 것으로 보여지는 50대~60대의 아저씨였는데 인자한 미소로, 오늘자 바간행 열차는 이미 마감되었으니 가장 빠른 바간행 열차라고 해도 내일 아침이 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대신 바간과 가까운 버마의 2번째 도시인 만달레이(Mandalay) 열차를 타는건 어떻겠냐고 제안해주었다. 열차를 놓친 것은 나의 과실이니까 새로 돈을 구입해서 살 수밖에 없었지만 아저씨의 자애로운 태도에 열차를 놓친 아쉬움과, 지난번 기차역에서 경험한 불쾌한 현지인의 태도에 대한 분노도 한결 누그러졌다. 그리고 여행이 끝난 지금 되돌아서 생각해보면 만달레이라는 도시에서의 만남을 위해서, 그렇게 운명이 기획되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져 들어진다. 


버마에서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경우에, 외국인의 경우 최고급 열차만 구입하도록 되어있다. 최고급 열차라고 해도 침대칸인 열차로 현지인에게는 부담스러운 가격일테지만 3만원대의 저렴한 가격대로 기억한다. 하지만 만달레이로 향하는 내 열차는 무슨일인지 현지인과 같이 탑승하는 침대칸도 아닌 일반 열차였는데, 유일한 외국인이 자신들과 함께 동승하자 버마 현지인들은 신기한 눈길을 보내왔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한 늙은이는 '니 자리는 여기가 아니야'가 아니라고 다짜고짜 버럭 화를 내면서 무례하게 소리를 질러왔는데, 다시금 주위 사람에게 확인해봐도 내 자리가 맞았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물론 친절한 이들도 많았지만 굉장한 '화(anger)'로 뒤덮인 사람들이 많다고 느꼈다. 자신들의 나라의 정치상황, 자신들의 경제 상황이 열악한 것에 대한 분노가 엉뚱한 사람한테 발현된다는 인상을 받았다. 


<열차 안에서 밖으로 내다본 풍경. 창문은 위로 끌어올려서 올리는, 낙후된 양식이었지만 그 나름대로의 정취가 있었다>



열차는 밤새 꼬박 달려서 다음날 아침 일찍 도착하는 여정이었는데 수시간 간격으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왕래했다. 찐 옥수수를 파는 사람도 있어서 반가운 마음을 가지고 구입하기도 했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 해서 좀처럼 잠을 청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하나의 헤프닝이라면 여분으로 사진을 찍을 용도로 챙겨왔던 샤오미(Xiaomi) 핸드폰을 도난당하고 말았다. 샤오미 핸드폰과는 인연이 나쁜지 벌써 두번째 분실이었다. 자면서 핸드폰을 떨어뜨린 모양이었는데 누군가 주워간 모양인지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지 않았다. 역 승무원에게 물어보니까 꽤나 중대한 사항으로 여겨져서 주변 사람들을 탐문했고, 영어가 되는 승객에게 통역을 시켜서 외국인이 귀중품을 분실한 경우에는 경찰에게 신고를 해야한다고, 만달레이에 도착해서는 함께 경찰서에 갈 것을 요구했다. 샤오미 핸드폰 자체는 저렴하게 세컨드핸드로 5만원선에 구입한 것이라서 큰 타격은 없었지만, 여행기간에 찍었던 사진들을 분실했다는 생각이 많이 안타깝게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부산격에 해당하는 2대 도시 만달레이에는 다음날 아침 7시 경에 도착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첫 내렸을 때의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고 정감있었기 때문에 '참 좋은 곳이구나'라고 인상을 받았던 것이 기억난다. 정취를 즐길 사이도 없이 바로 역무원과 함께 경찰서로 가서는 어디에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물건이 돌아왔을 때 되돌려 받을 수 있도록 이메일 주소와 연락처를 적도록 요구받았다. 사소한 경범죄에도 강력하게 외국인을 관리하는 것을 보면서 이 나라가 살벌한 군부독재가 살아 숨쉰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슬쩍 눈길질한 경찰서의 시설들, 이를테면 직원들이 쉬는 공간이며 화장실 시설이 열악함에 이 나라의 재정상황이 정말 많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몇년전 기사에서 버마 군부독재의 고위 간부의 딸이 결혼했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다이아몬드 악세사리를 예물로 해서 세계의 언론들이 비아냥 거렸던 것을 기억하는데, 본인들의 사리사욕만 챙기고 국민들을 챙기지 않는 모습을 느낄 수 있어서 다시금 이 나라의 정치지도부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전날 야간열차를 타고 도착했기 때문에 몸이 찌뿌둥했다. 일단 배가 출출했기 때문에 근처에서 밥을 해결하기로 했다. 


한참 싱가폴의 주변 동남아국들인 베트남, 미얀마 등지를 여행할 때이면 하나의 습관처럼 한식당을 찾아서 먹어보는 지라 마침 한식당이 하나 있길래 방문해보았다. 맛은 라면스프맛이 느껴지는 한식을 흉내낸 정도여서, 베트남에서 맛볼 수 있는 고퀄리티의 한식이 아니었다. 여행 다니다보면 우리 한국인들은 개척정신이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전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 식당이 진출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인터넷으로 대충 괜찮아 보이는 호텔을 예약하고는 호텔로 향했다. 애초에 목적지가 한국의 경주와 같은, '바간'이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만달레이에 왔기 때문에 도시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 상태였기 때문에 관광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호텔에서 몸을 쉬기로 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하루의 반이 지나간 상태였다. 즉흥 여행이라는 이번 버마 여행의 컨셉답게 어디를 갈까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양곤 공항에서 받아둔 지도를 곰곰히 살펴보았다. 


만달레이에는 크게 두가지 관광명소가 있는 것 같았다. 하나는 '만달레이 힐(Mandalay Hill)' 다른 하나는 '난다운 파크(nandawun park)'. 난다운 파크는 도시 정중앙에 있는 1859년에 세워진 왕궁이다. 





"도심의 가운데에 정사각형으로 왕궁이 만들어졌다. 1859년 민돈(Mindon) 왕에 의해서 완성된 이 왕궁은 외곽 성의 높이가 8m, 두께가 3m에 이르는 매우 견고한 성이다. 외곽 성곽의 길이는 한 변이 2km에 이르며, 성벽 바깥쪽으로는 깊이 3m, 폭이 70m에 이르는 인공 수로를 만들었고 그 위에 다리를 놓은 매우 견고한 형태로, 외부 적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이런 견고한 성도 영국군 앞에서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왕궁은 지금 군인들의 캠핑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군인들이 왕궁 안에 상주하고 있어서 왕궁으로서의 체면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관광객의 입장은 허용된다."



이 왕궁은 동서남북으로 출입구가 있는데 일부 출입구에서만 출입이 가능하며 개방 시간이 정해져 있는 등 누군가가 구글맵에 리뷰를 남겨둔 것처럼 관광객에게 우호적인 곳은 아니었던터라 아쉽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방문하지 못했다. 대신 만달레이 힐을 가보기로 했다. 


산의 정상에 사원인 파고다가 있는 양상이었는데, 불심이 깊은 나라인만큼 절로 가는 길이 산길이 아니라 돌길로 닦아 놓았기 때문에 가는 길이 편했다. 그리고 산을 오르면서 지나간 일들을 자연스럽게 회상하게 되면서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할 길에 대해서 사색하는 좋은 여정길이 되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까 한 젊은 스님이 앉아 있었다. 스무살이나 되었을까 세상에 때묻지 않은 맑음을 가진 젊은 스님이었는데 대뜸 거는 말이 영어를 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영어를 할 수 있다고 답하니까 미소를 지으며 나와 함께 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을 함께 했다. 


처음에 스님을 목격했을 때 받았던 인상이란, 수백년동안 나를 만나기 위해 기다려왔다는 무척이나 기묘한 느낌을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한 개인이 운영하는 학원에서 현대사회를 살아 가는데 필수적인 영어와 컴퓨터를 공부하는 한무리의 학생들이 있는데, 학원에서 선생님이 조언하기를 만달레이힐에는 많은 서양 사람들이 와 있으니까 영어를 연습하러 가라는 조언을 한 모양이었다. 가끔은 그렇게 만난 여행객의 자신의 학원에 초대하는 시간도 가진다고 했다.


주로 자신이 대화한 사람은 스페인 사람들이라고 했고, 왜 승려가 되었느냐는 나의 질문에 버마의 승려들은 많은 나라를 갈 기회가 있다고 했다. 스페인으로 일본으로. 과연 한국에도 버마에서 온 승려들을 목격한 것이 기억이 났고, 지금 그가 있는 버마라는 나라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스님의 사진을, 나의 플랫메이트이자 베스트프렌드였던 40대 남희언니에게 보여주자, 이 친구는 한국인이라고치면 고려대, 연세대 이런 곳을 갈 매우 똑똑한 친구라는 코멘트를 했다. 


산 정상의 사원으로 가는 길에는 점집도 있었는데 호기심 삼아서 점집을 들려 보았다. 인도에서 이주해 온 인도계 버마 사람이었는데 비록 점쟁이의 언어적 한계로 100프로 전달은 되지 않았지만 얼추 얘기해준 것은 이러했다. '니 남편은 매우매우 좋다' '올해 말쯤에 많은 사람들이 너한테 직장을 옮기라고 조언을 해줄 것이다'. 그런데 그해 말에 정말로 여러 헤드헌터가 연락이 왔고 그 중 한곳으로 첫 이직을 하게 되었었다. 


그리고 만달레이에서 바간으로 넘어가는 배에서 만났던 서양인 관광객이, 자신과 똑같이 점쟁이에게서 받은 팔찌를 한 것을 발견하고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자기 친구한테는 복권에 담청되든지 해서 부자가 될 것이라 했고(돈복이 많아 보였음) 자기 한테는 병이 걸리기 쉬우니 건강 조심하라고(진짜 허약해 보였음 ) 했는데, 뭐랄까 전반적으로 버마라는 여행에서 받았던 인상은 기이한 인연들로 짜여져 있어서 다른 여행지에서 경험하지 못한 마음이 공명되는 순간들이 여럿있었다. 


산 정상에 도착하자 스님의 학원 친구들이 한무더기 있었는데, 누가누구를 좋아한데 식의 이야기에 꺄르륵 거리는 천진함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한 여자 친구는 호텔에서 슈퍼바이저로 일한다고 자신을 소개했고(인물도 좋고 영어 발음도 깨끗하게 잘하여서 앞으로도 잘 될것이라 믿는다), 유독 피부색이 검은 친구에게는 방글라데쉬 출신이라고 놀리곤 한다고 했고(피부색 가지고 놀리는 것은 이 나라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흥미로웠다), 스님 친구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기억에 남는다. 



다른 친구들은 중간에 다 가버리고, 스님은 날이 어둑어둑해져서 이제 돌아가야할 때까지도 함께 해 주었다. 이렇게 만달레이 힐에서 영어 연습을 하기 위해서 무려 걸어서 왕복 3,4시간을 들여서 매일 오간다고 했는데, 다음에 만달레이에 오게 된다면 꼭 연락하라며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했다. '다음 생에 만나자'라는 내 말에 무척아쉬워 하는데, 이렇게 인연에 절절한 모습에서 이 친구가 아직 때묻지 않고 순수하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도 나이가 많이 든게 아니지만, 세월이 가면서 인연에 연연하게 되지 않게 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인연이 되면 만나는 것이고 인연이 안되면 흘러보내는 것이고.


여행을 다녀온지 벌써 두 해가 지났는데, 스님이 원하는대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면서 삶의 관통하는 혜안을 가진 스님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급작스러웠던 만달레이(Mandalay) 여행을 마치고는 바간(Bagan)으로 떠나기로 했다. 


만달레이에서 바간으로 이라와디 강을 따라서 페리로 이동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만달레이와 바간 사이의 거리는 매우 가까다. 그리고 두 도시를 가로지르는 이라와디(Irawaddy) 강이라고 있는데, 한국의 한강처럼 버마의 민족적인 상징과도 같은 강이다. 굳이 버스나 지하철로 이동하지 않고 배로도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찾아보니까 과연 두 도시를 이동할 수 있는 페리가 운영중이었다. 


한업체가 아니라 아마 다양한 업체들이 페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을 터인데, 지금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미화로 42달러이면 편도로 이동할 수 있다고 한다. 승선을 하니 마치 일일 크루즈 여행을 떠나는 분위기였다. 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서양인 여행객이었고, 누군가는 바깥의 테라스에 앉아서 여행 풍경을 스케치 하거나 가벼운 요깃거리와 음료를 시켜서 강변의 수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즐겼다. 다들 친구들과 여행을 하는지 혼자온 여행객은 나뿐인 것처럼 여겨졌다. 


기억에 남는 만남은 내 옆자리에 앉은 미국에서 온 여행객이었다. 내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The Alchemist)>를 읽고 있노라니 영어가 가능한 아시아인으로 판단한 모양인지, 말을 걸어왔다. 자신의 친구들이 너가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 많이들 추천했는데 어떤 내용을 닮고 있냐는 질문이었다.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 영어로 대화하는 익숙하지 않았서, 서툰 말로 자신의 꿈을 찾으로 떠나라는 여행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또다른 나와 그녀와의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내가 팔에 차고 있는 팔찌가 혹시 만달레이힐 산중턱에 있는 인도인 점쟁이 한테서 받은게 아니냐고 물어왔다. 그녀도 색깔만 다른 똑같은 팔찌를 보이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점쟁이한테 들은 내용을 알려줬는데 나중에 병으로 고생을 할 수 있으니 지병에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고(실제로 병색해보였음) 자신의 친구에게는 밀리어네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팔찌를 돈을 주고 구입했는데 나는 공짜로 받았다고 하니 잠시 분노하기도 했다. 


뒤돌아서 생각해보면 인도인 점쟁이가 하나 맞춘게 수많은 헤드헌터가 너한테 연락을 해올것이고 이직을 하게 될거란게 맞아떨어져서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똑같은 경로로 다시한번 여행하면서 또다시 내 장래가 어떻게 될지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몇시간을 배를 타고 이동했을까, 사람들이 웅성이며 가판대로 달라가 사진이며 동영상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서 보니 수많은 탑과 같은 건축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왠만한 도시에서 봄직한 현대적인 건물 하나 없이 아주오래전에 세워진듯한 불탑들만 보이는 장관은 수백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한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동남아시아라고 해도 요즘엔 개발이 많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이국적이다' 라는 느낌을 받는 경우는 점점더 드물어 지는데, 왜냐하면 글로벌화로 건축 양식들이 획일화 되어있기 때문에, 버마는 몇안되는 미개발 지역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나와 같이 미지의 여행지로 떠나는 것을 좋아하는 백페커 라면 분명 마음에 들 것이다. 



5000여개의 불탑 유적이 있는 바간
잠시 바간이 어떤 곳인지 네이버에서 찾은 백과 지식을 인용해 보도록 하겠다.  



만달레이 남서쪽 150km, 이라와디(Irrawaddy) 강(江) 동쪽 연변에 있다. 옛날에 중국의 윈난성[雲南省]에서 인도의 아삼 방면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로 버마족이 11∼13세기에 세운 바간왕조의 수도였다. 바간은 북쪽의 올드 바간(Old Bagan)과 남쪽의 뉴 바간(New Bagan) 그리고 냥우(Nyaung) 지역으로 구분된다. 도시의 주요 기능을 담당하는 곳은 냥우 지역이며 전통시장이 있다. 올드 바간은 바간왕조와 불교의 주요 유적지가 위치하며, 뉴 바간은 관광객을 위한 휴양시설이 위치한다. 


열대성 몬순 기후로 5월 말~ 10월까지 우기이며 이 때가 되면 많은 비가 내린다. 연평균 강수량은 2800mm가 넘는다. 이라와디 강에는 넓은 모래사장이 형성되어 있으며 강변의 동쪽으로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어 광할한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바간에는 주변을 포함해서 5,000여 곳에 이르는 불탑(佛塔) 유적이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불교건축의 보고(寶庫)인데 비슈누파(派) 사원, 석가모니의 일생을 표현한 정교한 그림이 유명한 구뱌욱지 파고다(Gupyaukgi pagoda), 주변 조망이 뛰어난 쉐산도 파고다(Shewe san daw pagoda), 술라마니 파고다(Sulamani pagoda) 등이 유명하다. 불교도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도 늘어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간 [Bagan] (두산백과)





바간에 머문 1박 2일간의 일정을 짧은 일정 동안에 호텔 리셉션에 부탁해서 전동으로 움직이는 오토바이를 하루동안 빌렸다. 자동차 운전면허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오토바이 운전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10분동안 간단하게 조작방법만 가려쳐받고 무턱대고 발가는대로 전동 오토바이로 도시의 이곳저곳을 달렸다. 도시의 수많은 불탑을 보고, 사원을 방문하고, 아주 소박한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끼니를 때우고. 패키지 여행을 좋아하지 않고 이렇게 느슨하고 소박한 여행을 좋아한다. 


이당시 2017년의 나는 아세안의 중심 싱가폴이라는 도시에서 일을 하면서 싼비행기값을 이용해서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동남아 여행을 다니며, 그리고 사람들한테서 받는 부정적인 기운들을 이런 방식으로 해소하곤 했다. 


당시에 사진도 많이 찍었는데 그동안 이곳저곳으로 이동을 많이 한 탓에 사진들을 중간에 분실해버렸다. 남아 있는 사진은 위에 지나가는 꼬마소녀에게 부탁해서 찍은 사진뿐이다. 참 많이 행복했는지 당시의 내 표정도 참 맑다. 그렇게 짧았던 1박2일 여행을 뒤로하고서 다시 싱가폴으로의 귀국편이 있는 양곤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저번과 같은 방식으로 기차를 타고서.


이번 기차여행에서도 기억에 남는 두 사람을 만났다. 한명은 20대의 젊은 청년이었는데 태국에서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현재 버마를 한달일정으로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삼촌이 독일에서 아주 유명한 버마 가이드북을 낸 사람으로 현재 양곤에 거주하고 있고, 자신은 삼촌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이야기했다. 내 침대칸 보다 앞에 타고 있던 청년은 달리는 기차안에서 고개를 내밀어 환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진정으로 자유로워 보였다. 


다른 한 사람은 달리는 기차안에서 일하는 역무원이었다. 역무원은 영어 단어 하나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사람이 굳이 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통하는 마음같은 것이 있어서, 다른 기차칸과 다르게 비어있는 내 기차칸에 타더니 자신의 살아있는 닭을 함께 실어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기차가 잠시 정지할 때에는 밖은 위험하니 나갈 생각 하지 말라며 대신 커피며 빵을 사주는 따뜻한 마음을 보이기도 했다. 감사한 마음에 내릴때는 사실 여행 추억으로 샀던 와인을 꺼내서는 감사한 마음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돌아서 지난 버마 여행을 추억하면 참 여러 사람들에게 보살핌을 받는 여정이었다. 그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받았던 관심과 사랑들이 의미하는 것은 다 무엇이었을까? 17살 처음 태국의 난민캠프에 방문하고 버마 난민들을 만났을 때부터 줄곧 이어진 나와 버마와의 인연처럼 버마라는 나라가 나를 따뜻하게 포옹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의 계시처럼. 


그리고 야간열차로 도착한 양곤에서는 나의 오래된 은사인 마웅저 선생님을 뵈었다. 선생님은 앞서 언급한 태국 난민캠프를 방문했을 때 현지와 한국을 연결하는 코디네이터 역활로서 알게된 버마 분이신데, 처음 뵈었을 때는 한국에서 버마 민주화운동을 하고 계셨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버마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모습들에 회의감 같은걸 느끼셔서 버마 어린이를 위한 단체를 설립하셨고, 현재는 10여년간의 한국 생활을 접고 버마에 들어가서 버마 어린이 교육을 위한 단체인 '따비에(Thabyae)'를 운영하고 계신다. 개발도상국의 어린이 돕기 운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래 홈페이지에 들어가셔서 자세한 활동 내역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다. 


http://thabyae.net/?ckattempt=1



그리고 참 오랜만에 양곤에서 마웅저 선생님과 재회했다. 선생님은 양곤에 들어오신 이후로 한국어를 조금 잊으신 탓인지 한국어가 조금 어눌해진 느낌이 들었지만 여전히 맑은 눈빛으로 환하게 맞아주셨다. 그 모습은 내가 왜 대학에서 국제관계를 전공하게 되었는지, 왜 동남아시아라는 국가들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원점'들을 일깨워 주었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 '이 친구도 앞으로 크면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큰 일을 할 것 같다'라고 기대를 가지고 말씀해 주시기도 했는데 말이다. 


이렇게 지금 블로그 포스팅을 적다 보니까 지난 추억들이 생각나면서, 3개월이라도 짧게 버마에 체재하면서 따비에에서 인턴쉽 활동이라도 하면서 내가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길은 무엇인지도 사색하면서 동남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4박5일간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17살 소녀때부터 가고싶어 했던 여행이었기 때문인지 잔상이 진하게도 남아서 길게 적어보았다. 수많은 좋은 곳을 가고 수많은 좋은 곳에 투숙하더라도 투박한 버마를 여행했던 경험이 내 안에서는 최고의 경험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가까운 시기에 또다시 이곳에 방문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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