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역사도 역사이기 때문에
어린 시절 매년 다 채우지도 못하는 다이어리를 사는 게 연초의 낙이었다. 내 일상을 기록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냐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다. 그저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하는 아이였고, 그중에서도 문구류. 특히 다이어리를 꾸밀 때 써야 하는 아기자기한 스티커들을 좋아해서 다꾸를 하기 위해 일기를 쓰곤 했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나의 문구 소유욕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어김없이 올해에도 다이어리를 3권이나 넘게 샀고, 결국에는 무지 노트에 정착해 매일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 (사실 있었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 현재는 동물의 숲에 빠져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으니까)
대학교에 들어오면서 본가에 있던 내 짐을 모두 버린 미니멀리스트 엄마 덕분에 학창 시절의 기록은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일 년에 3달이라도 작성했던 일기들은 내 자취방에 고이 놓여있다. 가끔 인생이 무료해서 그 기록들을 읽다 보면, 아 이때는 이랬구나. 혼자 깔깔 거리기도 한다. 아름답다고 사 모은 스티커들이 쌓여가는 걸 보고 더 이상 못 참겠다 싶어 작성하기 시작한 일기들을 지금 와서 꺼내보면 그 시절 내 감정들이 부끄럽기도 하고, 어쩔 때는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건 정말 별거 아니야.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어지기도 한다.
가끔은 과거의 내 기록들 사이에서 지금 지니고 있는 고민의 해답을 찾기도 한다. 어느 날 책을 읽다가 끄적인 낙서들을 보고 지금 와서야 깨닫는 것들도 있다. 다시 돌아봤을 때 흑역사인 과거도 있지만, 요즘 들어서는 흑역사라도 기억을 하고 있어야지 입체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교를 들어오면서 누군가에게 들키기 부끄러워 지웠던 내 학창 시절 미니홈피의 일기들. 장렬하게 첫 연애를 말아먹고 슬퍼서 적어놓았던 내 부끄러운 감정들. 친했던 친구와 절교하고 나서 과감하게 버렸던 그 시절 주고받은 편지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들이 내 역사이고 나만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들인데 당시의 감정에 못 이겨 버린 것들이 가끔 아쉽기도 하다. 불행하게도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 편지에 어떤 내용이 써져있었고, 고등학교 시절 어떤 감정을 지닌 채로 살았냐고 물어본다면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기억을 못 하고, 그 당시의 기록들은 이미 사라진 상태니까.
사실 2020년의 다이어리만 봐도 당장 지난주의 내 감정이 부끄러울 때도 있다. 지난 과거는 어쩔 때 항상 부끄럽게 느껴진다. 지금의 내가 더 나은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솔직한 내 과거의 감정. 지금 보면 오그라드는 그 시절 감성(사실 나는 오그라든다는 표현을 안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어쨌든 각설하고.)인 것 같아 수없이 삭제 버튼 혹은 이 일기를 태워버릴까. 고민을 하기도 한다. 특히 그 안에 나의 지난, 못난 사랑감정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지. 하지만 그 당시의 부끄러운 감정을 넘기고 나의 기록을 차곡차곡 쌓아두다 보면 그건 분명 나의 훌륭한 자산이 된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진 못하더라도, 그 기록이 나의 기억을 대신해주어 나를 더욱더 입체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준다. 어느 날 보면 이 글도 부끄러워질 때가 있겠지. 무언가 엉성하고, 주제도 확실하지 않고. 하지만 오늘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앞으로 나의 기록을 지우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부끄럽더라도 당당하게 가지고 있겠다는 다짐. 흑역사도 따지고 보면 나만의 역사이니까. 우리의 역사를 지우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