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니엘 Dec 18. 2015

리버풀 FC, 그 찬란한 역사의 시작 Part one

[다니엘의 'Football Mate'] 축구를 좋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축구 전문가가 될 때까지. 

알면 알수록 벅찬 감동을 선사하는 축구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리버풀 FC, 축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팀이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라 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떠올리기 쉬운 팀은

박지성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오일머니의 '맨체스터 시티', 박주영(?)의 '아스날'

삼성을 가슴팍으로 홍보하던 '첼시', 그리고 요즘 핫한 손흥민의 '토트넘 핫스퍼' 정도다.

리버풀을 위의 저 팀들보다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리버풀 팬일 것이다.


하지만 리버풀은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이자 오랜 역사를 지닌
최고의 명문 클럽이다.

리버풀 홈 구장 'Anfield'

# 역사의 시작


리버풀은 1891년부터 시작된다. 지금 리버풀의  홈구장인 '안필드'는 처음부터 리버풀의  홈구장이 아니었다.

같은 리버풀 시를 연고로 하는  에버튼의  홈구장이었다. 

에버튼은 당시 안필드 경기장의  소유자였던 존 홀딩에게 임대해서 경기장을 쓰고 있었다.

존 홀딩은 에버튼이 1891년 1부 리그 우승을 하며 많은 돈을 벌어들자 기존의 연간 임대료 100파운드에서

250파운드로 인상을 요구한다. 그러나 에버튼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8년간 쓰던 안필드를 떠나

현재까지  홈구장으로 쓰고 있는 '구디슨  파크'로 옮겨 갔다.


에버튼이 구디슨 파크로 옮기고 텅 빈 안필드를 보며 존 홀딩은 낙담하지만 새로운 생각을 해내게 된다.

바로 안필드를  홈구장으로 하는 새로운 축구팀을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존 홀딩은 1892년 3월 15일 그의 독자적인 축구 클럽을 신설한다. 이 팀이 바로 리버풀 FC다. 


존 홀딩(John Houlding)

구단의 최초 이름은 에버튼 애슬레틱(Everton Athletic)으로 정하고 이를 잉글랜드 축구 협회에 등록하려 

했지만 이미 에버튼이란 이름은 쓰이고 있기 때문에 혼동을 우려해 이는 기각된다.

그러자 존 홀딩은 새로운 구단명을 구상하던 중 자신의  친구로부터 한 마디 말을 듣게 된다.

"이 리버풀 도시를 대표하는 팀을 만들 거라면 도시의 이름을 그대로 쓰면 될 것 아닌가?"

바로 그 한 마디가 지금의 리버풀 FC라는 명칭을 만들어 낸 것이다.


# 팀의 시작과 기반


리버풀은 창단 첫 시즌, 랭커셔 리그에서 시작했다. 창단 첫 시즌 랭커셔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2부 리그로 승격하였고, 승격한 바로 그 시즌에는 무패로 우승을 거머쥐며 1부 리그로 승격되었다.

이후 리버풀은 1895/96 시즌 잠시 2부 리그로 강등되지만 리버풀은 1895/96 시즌을 우승하며 

다시 승격했고 1부 리그에서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으며 

1901년, 클럽 역사상 최초로 1부 리그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첫 1부 리그 우승을 해낸 것은 '톰 왓슨' 감독이지만 

리버풀의 초기 기반을 탄탄하게 만든 것은 윌리엄 바슬리,  존 멕케나, 두 초대 공동 감독이다.


창단 할 당시의 리버풀FC 스태프 및 선수단


윌리엄 바슬리와 존 멕케나 감독은 잉글랜드 만이 아닌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로 손을 뻗어 선수층을

두텁게 했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경우, 리버풀의 역사적인 인물들 중에 스코틀랜드 출신이 많기도 하다.

이 두 감독은 127경기 77승 20 무  30패라는 업적으로 리버풀의 초기 기반을 탄탄하게 잡아주었다.

창단 초기의 성공은 리버풀이 계속해서 더 나아갈 수 있는 단단한 발판이었다.


# 명예로운 날들과 좌절


톰 왓슨 감독은 1905/06 시즌 이후 10년을 더 팀에 머무르지만 우승컵을 아무것도 들어 올리지 못 했다.  

다시금 우승을  맛본 것은 1919년 데이비스 애쉬워스 감독이 부임하면서 팀을 재정비하였고 1921-22 시즌

1부 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이듬해인 1922/23 시즌 또한 우승하며 2연패를 달성했다.

그러나 그 이후 리버풀은 오랜 좌절을 겪었다.  1946/47 시즌 리그 우승을 하기 전까지 약 24년간 

아무런 트로피도 들어 올리지 못했다. 또한 46/47 시즌 이후 다시금 좌절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나마 1946/47 우승을 이끈 조지 케이 감독과 돈 웰쉬, 필 테일러 감독이 팀을 맡아 이끌지만 

약 13년 동안 아무런 소득 없이 세월을 보내야 했고 1954년에는 2부 리그로 강등되는 쓴맛을 봤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리버풀을 최고의 전성기로 들어서게 하고 리버풀 왕조의 기틀이 된다.


# 리버풀 왕조, 영광의 시대의 서막


1959년, 리버풀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감독, 바로 빌 샹클리 감독이 부임하게 된다.

샹클리 감독은  부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팀의 선수들을 정리했다. 이는 충격적이었다.

코치들은 물론이고 기존의 선수단 24명을 모두 방출시켰고 팀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리버풀 팬들은 '안 그래도 안 좋은 시기에 저자식은 왠 미친 짓이야'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리버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빌 샹클리(Bill Shankly)

샹클리 감독은 언론과 사람들의 비판에 뒤로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내 목표는 리버풀을 무적의 요새로 만드는 것이다. 누구도 리버풀에 범접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또한 그렇게 리버풀을 세우고 또 세워서 모든 이가 굴복하는 팀이 되게 할 것이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리버풀은 샹클리 감독 부임 두 시즌 만에  다시 1부 리그로 승격하였고

1963/64 시즌,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17년 만의 우승이었다.

많은 팬들은 샹클리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기 시작했고 바로 이듬해 1964/65 시즌,

리버풀 역사상 첫 번째 FA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1965/66 시즌 리그 우승, UEFA 컵 위너스 컵까지 

들어 올리며 역사상 처음으로 더블과 국제대회 우승을 따내기도 했다.


리버풀은 나를 위해 만들어졌고, 나는 리버풀을 위해 만들어졌다. - 빌 샹클리

 

이후 샹클리는 5위 - 3위 - 2위로 괜찮은 성적으로 세 시즌을 보냈지만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한번 과감한 재정비를 단행한다. 기존 팀의 주축으로 전성기를 보낸 '로저 헌트', '론 예이츠'

'이안 세인트 존' 등을 떠나보내고 젊은 선수들로 과감한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샹클리 감독이 부임 당시 가장 원했던 두 선수, 당시 리버풀 팬들에게 팀의 간판 스타인 론 예이츠와 

이안 세인트 존과의 이별은 팬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샹클리 감독의 결정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성공적. '케빈 키건', '존 토샥', '레이 클레먼스' 이들은 샹클리의 아들들이라 불리며

1972/73 시즌, 리그 우승과 함께 첫 UEFA컵 우승을 차지하며 두 번째 더블 우승을 달성하였고

이듬해 73/74 시즌에는 FA컵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그라운드를 호령했다.


하지만 73/74 시즌이 끝나고 빌 샹클리 감독은 갑작스레 사임 의사를 밝혔다.

이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 했고 팬들은 데모와 공장과 교통 등의 파업을 단행하며 샹클리 감독의 사임의사에

반발했지만 샹클리 감독의 의지를 꺽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앞으로 리버풀이 가져올 영광의 시대의 서막에 불과한 것이었다.


왼쪽부터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로니 머렌, 루번 베넷
정장을 입고 나란히 서 있는, 리버풀을 찬란한 영광의 시대를 이끈 바로 그들.


Part  2에서 이어집니다.


구독과 댓글은 큰 힘이 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