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의 'Football Mate'] 축구를 좋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축구 전문가가 될 때까지.
알면 알수록 벅찬 감동을 선사하는 축구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YOU'LL NEVER WALK ALONE, 그대는 결코 홀로 걷지 않으리.
약자로 줄여 YNWA라고 부르는 이 말은 리버풀의 상징적인 존재 중 하나다.
1963년에 Gerry & Pacemakrs라는 리버풀의 가수가 불러 유명해진 곡인데
이 노래의 가사가 비참한 여주인공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내용으로 여러 곳에서 쓰이다
빌 샹클리 감독 시절 안필드에서 리버풀 팬들이 응원가로 사용하게 된다.
이때부터 정식적으로 리버풀의 응원가가 되었고 도르트문트나 아약스, 셀틱 등 여러 팀들도
많이 사용했지만 지금까지 쓰고 이를 구단을 대표하는 응원가와 상징적인 문구로 쓰는 팀은
리버풀 뿐이다. YOU'LL NEVER WALK ALONE 은 리버풀 홈구장 안필드에 빌 샹클리 감독을
기리는 샹클리 게이트의 위쪽에도 새겨져 있다.
샹클리 감독의 끝은 아름다웠다. 16년간 리버풀을 지휘하며 그가 만든 리버풀은 그의 말대로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요새가 되어 있었다. 샹클리는 1981년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자신의 큰 업적들과 함께 'YOU'LL NEVER WALK ALONE'이라는 말과 함께 여전히 안필드에서
리버풀 팬들과 함께 하고 있다. 리버풀 팬들은 그를 이렇게도 부른다. '리버풀 축구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
샹클리 감독의 갑작스러운 사퇴는 그의 건강문제였다. 본인의 건강에 큰 위험을 느낀 샹클리 감독은
자신을 보좌하던 어시스턴트 코치였던 밥 페이즐리 코치에게 지휘봉을 넘기며 물러나게 된다.
밥 페이즐리 감독은 갑작스럽게 지휘봉을 이어받았고 이는 새로운 영웅의 등장이었다.
많은 이들은 역사상 최고의 나날들을 보낸 샹클리의 리버풀의 후임은 독이 든 성배라고 얘기했다.
물론 페이즐리 감독 또한 심적 부담감이 말로 형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페이즐리 감독은 구단내에 어느 누구보다도 리버풀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선수 시절부터 코치 그리고 감독까지 리버풀에만 몸담은 원 클럽 맨이었고 샹클리 감독의
발자취를 이어가기에 충분히 적합한 사람이었다. 페이즐리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1974/75 첫 시즌,
FA컵과 리그컵 조기 탈락을 하고 체리티 쉴드 우승컵 하나만을 겨우 들어 올리자 사람들은 샹클리 감독이
이뤄놓은 그 위대한 업적들이 모두 무너지는 것이 아니냐며 불신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페이즐리 감독의 지휘 아래 리버풀은 점점 변해가고 있었고 그의 색을 입히기에 1년이면 충분했다.
페이즐리는 필 닐, 테리 맥 더 모트를 영입하면서 수비와 미드필더진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샹클리 감독 시절 1군과 2군을 오가던 공격수 레이 케네디를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시키며 변화를 가져왔다.
다음 해인 1975/76 시즌, 페이즐리의 리버풀은 리그에서 QPR을 승점 1점 차로 무릎을 꿇게 만들어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UEFA컵 우승까지 거머쥐면서 더블 달성에 성공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페이즐리의 리버풀은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76/77 시즌, 페이즐리 감독은 모두에게 공표한다.
모두가 페이즐리의 지도 아래 하나로 뭉치며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76/77 시즌, 또다시 맨체스터 시티를 승점 1점 차로 무너뜨리고 리그 2연패를 달성한다. 그리고 이번엔
UEFA컵(현재 유로파리그)이 아닌 지금의 챔피언스리그인 유러피언 컵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데 성공한다.
이후 리버풀은 FA컵 결승전에 진출해 트레블의 고지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선수들의 자신감과 동기부여는 치솟았고 언론들마저도 리버풀이 승리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승부는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경기가 시작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선제골을 기록하며
경기를 이끌고 나갔고 리버풀이 동점골로 만회했지만 만회 5분 만에 실점하며 패배했다.
아쉽게도 역사상 첫 트레블 달성을 물 건너 갔지만 리버풀은 리그와 유러피언 컵 더블에도 만족스러웠다.
사실 체리티 실드를 포함하면 트레블이라고 할 수 있지만 미니 트레블이라고 해두자.
이후에도 리버풀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이듬해 77/78 시즌에 다시금 유러피언 컵을 들어 올리면서
2연패를 달성했고 페이즐리 감독은 유러피언컵을 2연패 한 영국 국적의 최초의 감독이었다.
페이즐리의 리버풀은 이 후에도 수많은 우승을 거머쥐었고 그의 재임 기간 9년 동안 20개의 트로피를
선물하고 그의 마지막 1983년 리그와 리그컵 우승 더블을 끝으로 리버풀과 작별인사를 했다.
페이즐리 감독은 어린 선수를 발굴하는 데에 특출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리버풀에 재임하는 동안
케니 달글리쉬, 앨런 한센, 그레엄 수니스, 로니 웰란, 브루스 그로벨라 등의 리버풀의 역사적인 레전드 등을
발굴하고 영입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밥 페이즐리 감독은 영국 내에서도 최고의 감독이라고 여겨진다.
가끔 알렉스 퍼거슨 경과 비교가 많이 되는데 퍼거슨 경은 27년의 감독 생활을 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38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지만 페이즐리는 9년의 감독 생활만으로 20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알렉스 퍼거슨 경이 BBC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도 페이즐리의 리버풀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감독 생활을 하며 한 가지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빅이어를 세 번이나 들어 올린 페이즐리의 리버풀과
나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싸워보지 못한 것" - 알렉스 퍼거슨 경
페이즐리 감독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샹클리 감독이 어시스턴트 코치였던 페이즐리 자신에게 지휘봉을
물려준 것처럼 그는 어시스턴트 코치, 조 페이건에게 지휘봉을 물려주고 리버풀을 떠난다.
페이즐리, 페이건 등 그들의 계속된 성공의 비결은 샹클리 감독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인 '부트룸' 이 있다.
부트룸은 선수들의 탈의실 옆에 있던 아주 작은 공간으로 원래는 선수들의 축구화를 놓던 장소였다.
샹클리 감독은 그 작은 공간을 그와 리버풀 코치들이 모여서 전술을 논의하고 구단에 관한 의견을 내기도 하고
가끔은 선수들과 진지한 이야기도 나누는 하나의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이 부트룸에서 샹클리 감독과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누던 코치들을 부트룸 보이스(Bootroom Boys)라고
불렀는데 이 부트룸 보이스가 바로 샹클리 감독에 이어서 리버풀을 화룡점정에 올려놓는 밥 페이즐리와
조 페이건 감독이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프리미어리그를 도입하면서 방송사의 요청에 따라 모든 구단의 경기장마다 기자회견장을 만들 것을 요구했고 리버풀은 딱히 갖출 만한 공간이 없었고 그때
부트 룸과 그 옆 공간을 틔워 기자회견장을 만들었다. 이 부트룸이 없어진 이후, 즉 프리미어리그 도입 후
리버풀은 단 한 번도 리그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 있다.
Part 3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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