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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상수첩 Jan 15. 2018

두렵지 않다는 말

 오늘은 미국에서 돌아온 동기 둘과 다른 동기 한 명과 함께 넷이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주변 카페에서 맥주를 한 잔 하는데 어떤 맥락이었는지 D형이 죽는 건 별로 두렵지 않다...는 말을 했고 J도 동의했다. 무엇보다 안전을 추구하는 L은 동의의 표시를 하지 않았고 거짓말, 이라고 나는 생각을 했다. 무엇인가가 두렵지 않을 때는 우리는 그것이 두렵지 않다고 애써 말하지 않는다. 햇빛이 자외선을 품고 있듯 두렵지 않다는 말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있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만 앞으로 살아가는 것이 조금은 더 두려워서 다행이다.


정말 많은 주제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했는데 예를 들어 전 남친 여친을 한 자리에 모아 파티를 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 싸우지 않는 연애 이야기, 스토커 이야기, 미래 이야기... 그러나 세부적인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불과 두 시간 전 일인데. 알콜성 치매가 벌써 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만 주고받은 말들이 그리하여 우리는 외로워,라는 한 문장의 변주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컵에 물이 반틈 담겨 있다. 내가 어릴 때는 물이 반이나 있네,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배웠고 나는 반틈 밖에 없네, 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아이였다. 이제는 그냥 컵에 물이 반틈 있으면 반틈 있는거다 라고만 생각하고 싶고 이 모든 생각들은 사실 며칠 전 꾼 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잠결에 눈은 감고 손만 움직여 머리맡에 늘 두는 초록색 양지노트에 이 생각들을 적고 다시 잤다. 물이 반틈 있다 그리고 끝. 새로운 좌우명이 될 것만 같다.


어제는 재스를 만났다. 재스는 정말 좋은 사람이고 귀한 친구다. 함께 자전거 타고 도서관 언덕길을 오르던 날들과 학원 끝나고 새벽까지 야구하느라 동네 부모님들이 난리 났던 날이 생각나서, 우리는 이렇게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뻐서 소주를 두 병이나 마셨다. 내일은 월요일이니까 어제 마신 기네스 사진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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