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닮은 로봇과 함께 사는 미래의 모습은 어떨까?
제가 하기 싫은 숙제를 다 시킬래요.
저 대신 공부하라고 하고 저는 나가서 계속 놀래요.
아이들과 얘기하는 로봇과 함께하는 미래는 단순하고, 희망차다. 로봇이라면 ‘나’를 대신해서 뭐든지 해주는 말 잘 듣는 친구쯤 되려나. 아니 오히려 친구보다 편한 구석도 많다, 상대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고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다. ‘충성’을 기본으로 탑재한 로봇 친구는 체력도 좋다. 만에 하나 오류가 나더라도 딱히 겁낼 건 없다. 없애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또 한편에선 이렇게 얘기한다. 그 로봇 친구를 누구나 가질 수 없을 수도 있다고, 로봇을 갖지 못한 사람은 하기 싫은 일들을 사람이 전부 해야 할 수도, 오히려 로봇이 네가 하려는 일까지 다 로봇의 차지가 되어 버릴 수도 있다고. 그리고 로봇의 오류는 없애버린다고 끝나는 게 아닐 수도 있다고.
우리는 실체가 있는 듯 없는 미래를 생각하며 긍정의 회로와 부정의 회로를 잔뜩 끌어다 미래를 상상해본다. 커피를 만들고 서빙을 하는 로봇과 동시대를 사는 지금, 인간을 닮은 로봇과 만남은 문학에서도 그리 머지않은 미래이기 때문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은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 로봇과 함께 살게 되는 미래의 이야기다.
<클라라와 태양>에서 인간은 본래 가진 것에서 능력을 ‘향상’시킨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로 나뉜다. 큰돈이 들고, 생명에 위협이 되기도 하지만 ‘향상’한 인간들은 원형 그대로의 인간과는 다른 계급에서의 삶을 산다. 과학 문명의 발달로 인간은 로봇에게 ‘대체’되기도 하고, 인간과 기계가 함께 사는 세상에서의 갈등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공간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클라라는 인간이 아닌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자신의 주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클라라가 십 대의 여자아이 조시의 AF(친구 로봇)이 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천 개의 파랑>의 미래도 경제적 효율에 따라 인간이 로봇에게 대체되고 있다. 불이 나고 무너진 건물 더미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보경은 재난 구조 로봇의 계산 결과 살 수 있는 확률 1%을 무시한 인간 소방관의 무모함 덕에 살아났다. 하지만 살아날 확률 80%를 앞에 두고도 남편인 소방관의 죽음을 목격한 보경과 그의 딸, 연재와 은혜, 그리고 폐기되기 직전 깨어난 로봇 ‘콜리’가 <천 개의 파랑> 주인공이다.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감정을 숨기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상대를 상처 내기도 하는 인간들의 화법은 휴머노이드 로봇 클라라와 콜리가 해석하기에 복잡하기만 하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인간들의 대화가 얼마나 많은 모호함과 본인도 파악하기 힘든 감정들의 종합체인지가 로봇과의 대화에서 더욱 여실히 드러난다. 그 인간들 사이에서 오직 자신의 첫 번째 명령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휴머노이드 로봇들의 순정은 놀랄 만큼 진지하다. 이해와 계산, 자존심과 상처, 내 편과 네 편이라는 인식 없이 오로지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로봇들이라니. 소설 속 그들의 존재는 정해진 삶의 명령에 따라 개인의 욕망과 의지에 방해받지 않고 순수하게 움직이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들은 처음엔 실눈을 뜨고 인간을 닮은 로봇을 흘겨보지만 어느 순간 기계에게 의지를 하고 마는 나약함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고민한다. 인간을 닮은 저 기계는 인간인가 아닌가? 인간보다 더 잘 인간을 이해하는 저 기계는 인간인가? 아닌가? 인간을 완전히 복제하는 저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가? 없는가? 점점 빨리 변해가는 시대를 앞에 두고 해답을 찾지 못한 인간들은 계속 질문한다. 인간의 손이 닿지 못했던 운명, 신의 처분으로 미뤄뒀던 일들의 경계가 무너질 때, 인간은 그것들을 다 짊어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책을 읽는 동안 계속했다.
만나지 못한 미래에 대한 상상을 토대로한 이야기는 무수히 많지만 공교롭게도 최근 읽은 두 이야기 속 휴머노이드 로봇의 모습은 많이 닮았다. 미래에도 역시 세상은 계급이 나뉘고, 인간이 로봇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보장할 수도 없다. 그런 중에도 인간은 자신을 완벽히 이해하고, 사랑해줄 최소한 배신은 하지 않을 것 같은 대상을 찾아냈으니 이것이 휴머노이드 로봇이 아닐까. 우리가 타인에게 바라는 맹목적인 이해와 용서,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 판단력과 적당한 눈치를 탑재한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로봇의 등장. 그런 로봇이 등장한다면 우리는 이제 서로 힘들게 관계 맺지 않아도 될 것인가? ‘인간다움’을 굳이 행하지 않아도 될 것인가? 어차피 인간을 닮은 기계들이라면 인간의 욕망대로 사용하고 나면 그뿐 아닐까? 인간의 욕구에 맞춤한 로봇들을 제작할 수 있다면 인간의 존재는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기술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을 편하게 업그레이드 시키고 있지만 인간이 만든 문명이 너무도 노골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의 욕구를 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를 방해하지 않고, 나를 위해 희생해줄, 배신하지 않는 존재에 대한 갈망. 용도를 다했으면 깔끔하게 사라지면 될 만큼의 무게. 미래의 인간들이 원하는 만큼의 가벼움과 편리함, 어쩌면 가끔 우리가 타인에게 요구하는 무게가 딱 그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써놓고도 곰곰 생각해보니 자신을 희생하고, 대의를 이룬 위대한 인물들의 이름이 줄줄이 떠오르는데, 정말 인간이라는 존재는 알다가도 모를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이틀 내내 비가 오늘 주말에 읽은 두 권의 책, <클라라와 태양>과 <천 개의 파랑>에 담긴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너무 인간 같아서, 너무나 인간이 원하는 인간 같아서, 인간이 원하는 인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