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남성학과 남성 욕망 연구의 귀한 단초
복수극은 아주 흔한 극적 소재다. 고대 그리스부터 햄릿에 이르기까지 복수극의 기본적인 플롯과 서사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을 정도로 이미 완성된 소재다. 하지만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복수극의 공통된 특징이라면 복수를 행하는 주인공이 대부분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상류층으로 설정해 놓은 경우가 많다. 복수극은 비극적 요소가 많은 소재이다보니,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비극의 원칙에 충실했던 것 같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접어들면서, 복수극도 우리의 일상을 해체시키는 쪽으로 발전하게 된다. 복수행위자가 점점 더 우리 주변의 사람들로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 중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단연 소재와 미장센 면에서는 압권이며, 킬빌을 비롯한 여성을 앞세운 복수극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억압된 사회에 대해 총격을 가한 <델마와 루이스>로부터 시작된 여성 복수극은 점점 개인적 복수로까지 이어진다. 이는 여성주의가 확대됨에 따라 여성의 주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장치로써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경향은 비단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한국영화까지 이어져 온 아주 중요한 소재였다.
영화가 복수극을 이용해 여성에 대해 연구를 하기 시작한 후, 밀레니엄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또 새롭게 각광받는 복수극의 의미있는 설정이 있다. 바로 '아저씨'의 등장이다. 인간의 성별체계는 단순한 것 같지만 사실은 연령에 따라 그 시대적 표상이 다르게 작용하는 아주 복잡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아가씨와 아주머니는 다르고, 총각과 아저씨는 전혀 다른 상징을 나타낸다. 즉 같은 성별이라도 나이에 따라 대표되는 기질이 서로 다른 인식상의 기질이 대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 남자의 복수극과 '아저씨'의 복수극은 복수를 행하는 이유에 있어 전혀 다른 논리를 취한다. 복수에는 '분노폭발'의 요소가 주된 감정적 동기를 제공하는데, 이 동기의 접근방식이 청년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아저씨'들의 분노는 기본적으로 잠재되어 있다. 그것이 사회정의에 대한 분노든 개인적 사연에 따른 분노든 청년의 한계치보단 훨씬 높다. 그래서 때론 방관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무심한 듯 보이기도 한다. 1987년과 2016년 대한민국을 들끓게 만들었던 광장에 '넥타이 부대'나 '아저씨 부대'는 항상 후발대였다. 이는 또다른 함축적 의미를 보여주는데, 아저씨들의 분노표시는 '분노 테이킹'의 임계점을 이미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이 '분노'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가장 주된 이유는 단순하다. 지킬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족이든 사회적 명성이든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 대부분이 자신과 가장 밀접한 것과 관련이 있다. 본인 스스로가 다칠 것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내가 다침으로 인해 남겨지는 것들에 대한 이익형량을 끊임없이 재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남겨질 것들' 또한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는 가능성이 확실해졌을 때, 아저씨들의 분노는 폭발한다. 더 쉽게 말하자면, 움직이지 않아서 무언가를 지킬 가능성보다 움직임으로 인해 무언가를 지킬 가능성이 더 커질 경우에만 극단적으로 일어선다는 것이다.
2000년에 들어오면서부터 사회와 자본주의 시스템은 점점 더 도덕성에 의심을 받기 시작한다. 이것은 단순한 사회정의적 측면임과 동시에 자본주의라는 현실적 문제에 부딪힌 아주 개인적인 측면이 중첩되어 있다. 98년 IMF로 인해 수많은 가장들과 아저씨들은 부도덕한 사회가 만들어낸 희생양이 되었다. 그 혼자만이 아니라 가족들까지 모조리 말이다. IMF가 빗겨 갔다고 해서 다른 나라들도 예외가 될 순 없었다. 미국발 경제위기는 전세계 경제를 자빠뜨렸다.
성실하게만 살아온 아저씨들은 어디에서 위로를 받나. 이럴 때 극은 아저씨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주기에 충분하다. 할리우드는 2004년 덴젤 워싱턴을 앞세운 <맨 온 파이어(Man on Fire, 2004)>을 통해 아저씨들의 진정한 정의구현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아저씨들의 성실함이 사실은 비도덕적인 자본주의를 성장시킨 원동력이었다는 메타포는 덴젤 워싱턴을 국가주의 정보요원이라는 설정으로 부활시켰다. 국가를 위해 휘두르던 근면했던 폭력, 하지만 그것이 사실은 개인적 가치관과는 대립되어 정신적 혼란을 격는 주인공. 하지만 주인공인 크리시는 폭력의 잔인성을 더 이상 국가나 집단을 위해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정의에 발현시킨다. 자신에게 유일하게 다정하고 웃어 주었던 피타(다코타 패닝 분)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2010년에 개봉한 한국영화 '아저씨' 또한 '맨 온 파이어'와 기본적인 플롯과 서사구조는 다르지 않다. 할리우드 특유의 미장센과 컷편집이 없을 뿐,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와 액션으로 아저씨들의 정신세계에 침투했다. 다만 덴젤 워싱턴이 보다 현실적인 아저씨였다면 원빈이라는 특별하게 잘생긴 아저씨 덕분에 현실감이 조금 떨어졌을 뿐.
2015년 개봉한 <더 이퀄라이저(The Equalizer)> 에서의 덴젤 워싱턴은 조금 더 아저씨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다. 10년이라는 세월동안 덴젤 워싱턴 또한 조금 더 관록이 깃든 아저씨 역할을 충분히 소화해낸다. 리암 리슨과 같은 아저씨라도 납치된 딸을 구하기 위한 아저씨와 주변의 인묻들을 구하기 위한 덴젤 워싱턴은 복수의 동기설정에는 약간 차이가 있다. 이퀄라이저, 균형자라는 제목답게 악에 대한 선의 균형을 맞추는 포스가 압권이다.
하지만 모든 아저씨 복수극에서 등장하는 공통점은 아저씨들의 '로망' 충족에 있다. 미장센과 컷편집은 오로지 아저씨의, 아저씨를 위한, 아저씨에 의한 것들이다. 식상하리만큼 영웅물의 화면공식과 닮아있다. 이는 마치 아저씨들에게 객관적인 누군가가 바라보는 내가 아니라, 스스로 거울을 보며 나르시시즘에 빠진 듯한 아저씨를 반영한다. 극이 관객에게 주는 '동일시'는 극단적으로 적용된다.
'더 이퀄라이저'에서 악당들이 주인공인 로버트 맥콜에게 항상 묻는 말이 있다. 'Who are you?' 다. 맥콜의 피의 복수에 죽어가면서 그들은 하나같이 '도대체 너란 새끼는 누구냐' 며 묻는다. 하지만 맥콜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오히려 그들에게 되묻는다. 'What do you see when you look at me?", 날 볼때 너는 뭐가 보이냐.
이 질문은 정말 본인도 모르기에 묻는 말이다. 다만, 이 대사 자체가 주는 공포감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원빈도 이런 비슷한 대사를 하는데, '너희들은 내일만 보고 살지,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전혀 다른 맥락의 대사같지만 '아저씨'의 본질을 두면 결국 같은 소리다.
이처럼 현대극에서 보여주는 아저씨는 어쩌면 '남성학'의 기초자료가 될 지도 모른다. 남성이 남성을 보며 열광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저씨 영화들은 그런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잠재된 사회의식과 적당한 폭령성, 아저씨들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본능적 소양이기 때문이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은 미루도록 하자. 모든 남성을 일반화시켰다는 주장도 차체하도록 하자. 평균적인 수준에서 아저씨들의 언어와 상징은 분명히 존재한다.
사라 폴리 감독, 미셸 윌리엄스 주연의 '우리도 사랑일까' 라는 영화가 있다. 불륜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는 남성시각의 불륜영화가 아니다. 권력, 명예 등의 가부장적 요소를 물리치고 철저히 여성시각에서 바라보는 결혼생활과 사랑의 방식을 담아냈다. 이 영화의 화면에는 남성의 시각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주인공인 마고와 내연남 대니얼이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를 탈 때 보여지는 장면은 가히 인상적이다. 빙글빙글 도는 놀이기구에 함께 앉은 두 남녀, 그리고 화면에 나타나는 대니얼의 팔뚝. 남성감독이었다면 저런 장면을 담아낼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이처럼 아저씨 복수극에서도 우리가 유심히 살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아저씨들의 분노구조에 대한 고찰과 잠재된 자기만족감에 대한 고찰이다. 인간은 영화라는 언어를 통해 다양한 상징을 나타내기 마련이다. 단순히 오락성의 영화관람보다는 미장센과 화면을 통해 아저씨의 로망을 확인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