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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현 Nov 26. 2018

<사도>, 사극이 아닌 가정비극

사도세자는 영원한 고전이다

    영화 <사도>는 일반적인 사극영화가 아니다. '관상'에서처럼 권력과 시대를 재해석한 영화도 아닐뿐더러, <명량>의 영웅의 인간적 고뇌 그려내는 스토리도 더더욱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다루는 수많은 사극들이 있지만, <사도>는 기존 사극 공식과 궤를 달리 한다. 그것은 바로 왕가라는 특수한 가정의 가정사가 깃든 철저한 가정극으로 이야기가 재해석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바꾸는 흐름에 '명분'이 중요하듯이, 역사극에도 등장인물들이 행위나 태도에는 그 계기와 명분이 중요하다. 몇해전 웰메이드 드라마라고 칭송받던 '정도전' 에서도, 주인공 정도전 의 안타고니스트였던 '이인범' 이나 '이방원' 또한 나름대로의 명분을 심어주었다. 고전사극과는 다르게 현대사극에서는 등장인물 하나하나에게 '그럴 수 밖에 없는' 혹은 '그럴듯한'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절대적 악인 프레임을 무너뜨렸다. 이를 두고 역사의 재해석이냐 미화냐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인간사 얽히고 얽힌 복잡성과 한 개인의 실제 의도는 추축과 상상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사도세자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는 수도 없이 많았다. 모두 한결같이 사도세자의 '광기'에 초점을 맞추어 왔고, 그 '광기'의 원천을 다루고자 했다. 하지만 광기의 원천을 다룸에 있어, 대부분은 사도세자를 외부 권력 암투의 희생양으로 그려내는 경우가 많았다. 부자관계가 박살나는 원인조차도 왕권을 가진 영조와, 새끼호랑이 사도세자를 둘러싼 당쟁의 결과물로 본 것이다. 


    하지만 영화 <사도>에서는 '권력'이라는 키워드에 핀조명을 쏘지 않는다. 오로지 영조라는 아버지와 사도세자라는 아들의 비극적 관계만을 철저하게 담아냈다. 가정사를 다루다보니 '미화'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내면의 심리와 콤플렉스를 파고 들면서 오히려 현대 심리극의 요소들이 눈에 띄기도 한다. 


    좋은 고전이란 무엇인가, 시대가 바뀌고 역사의 흐름이 바뀌더라도, 작품이 만들어진지 몇 백년이 지나더라도, 인간에게 질문을 던져줄 수 있다면 좋은 고전이다. 빅토르 위고의 작품들이 훌륭한 고전으로 읽힐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2016년 우리를 광장으로 나오게 한 정부의 무능과 부패는 '레 미제라블'을 다시 읽게 했다.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졌다"는 <웃는 남자> 그윈플렌의 외침 역시 현 시대에 유효하다.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졌다."


    <사도>는 현 시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부모가 보는 <사도>와 자식이 보는 <사도>는 그 느낌과 전제부터가 다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그래서 영화는 아버지와 나의 관계에 자연스럽게 투영되었다. 


    내 아버지는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다. 평생을 학자로 사신 덕에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꼿꼿한 선비체질을 가지셨다. 책상은 항상 반듯하고 연필과 지우개 등은 제자리가 있을 정도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성장기를 거쳤다. 영조가 사도를 보며 '데님'을 다시 매라는 장면에서부터 영조는 나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공부에 관해서는 영조만큼이나 집착하진 않았지만, 집안 분위기 자체가 워낙 '공부'쪽으로 기울여 있다보니, 영조가 사도에게 '공부'를 이유로 타이를 땐 내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그때 네가 보여준 총명과 슬기를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랬던 네가 칼장난하고 개그림이나 그리며 공부를 게을리할 때,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나는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다. 물론 엄마의 강요가 깃든 탓에 이내 그만두었다. 그래도 피아노 악보보다는 동화책이나 과학서적 따위를 많이 읽었다. 세상 어떤 집 자식이 어린 시절에 안 똑똑했겠냐마는, 그 시절 누구도 가르쳐 준 적 없던 컴퓨터를 어깨너머로 배워 익혔고 '어린이 퀴즈' 프로그램에 나오는 문제들을 다 맞출 정도로 나름 똑똑했었다. 아버지 또한 그 어린시절부터 나의 학자로서의 재능을 눈여겨 보았으리라. 하지만 사춘기 시절부터 책을 점점 멀리하고 나는 자유로운 생활을 꿈꾸었다. 공부보다는 '잡기' 에 관심이 더 많았고, 놓았던 피아노를 스스로 다시 치기 시작했다. 


"네가 어릴 때 책도 많이 읽고 똘똘할 때 치던 피아노 소리는 참 듣기가 좋았는데, 공부해야 될 고등학교 때 피아노를 치자 피아노를 다 때려 부수고 싶었다."


    <사도>가 개봉되기 전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이었다. 나는 이 말이 자연스럽게 영조의 대사와 겹쳐 보였다. 부모의 기대와 자식의 부응, 이것이 극으로 치닫을 때 가정의 비극이 시작된다. 나는 다행히도 거기까진 미치지 못했던 듯 하다. 그러기까지 중간에서 어머니가 많이 괴로웠을터. 이제는 나도 가정을 이루고,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우리 부자관계를 돌이켜 볼 여유도 생겼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의 문제점들을 되짚어 본다. 시대와 배경만 다를 뿐, <사도> 판박이였다. 


부자관계 트러블은 '간암'과 비슷하다. 침묵으로 문제가 발생되고, 침묵으로 문제가 더 커진다. 아버지는 '칭찬'에 약하고 나는 '인정'에 목말랐다. 하지만 이 두가지는 서로에게 충족되지 못했다. 아버지에게는 나는 '칭찬'할만한 아들이 아니었고, 내게 아버지는 '인색하고 냉정한' 아버지였다. 이런 문제는 나 뿐만 아니라 참 많은 부자관계가 공통으로 겪는 현상이다.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어찌하여, 너와 나는 이승과 저승의 엇갈림길에 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밖에 없단 말이냐."


영조와 사도는 이와 비슷한 생각을 실제로 하였을까. 그러했길 바랄 뿐이다. 그래야 그 죽은 역사가 살아있는 역사로 바뀌고 그것은 고전이 되기 때문이다. 부모자식관계는 인류의 숙명과도 같은 일,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사도세자에 대한 회자는 끊임없이 반복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참 하찮다. 신도 아닌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에 조차 갇혀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 스스로가 고민하는 본질적 고민조차 풀어낼 수 없는 나약함, 그래서 비극은 인간을 돌아보게 한다. 그 중에서도 수많은 비극 중 <사도>처럼 인간이 태어나 처음으로 속하는 집단인 가정사의 비극은 삶의 모순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기에 그 씁쓸함이 외려 더 처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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