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이틀은 밤 9시 넘어서 나머지 이틀은 8시에 그리고 하루는 7시에 퇴근하는 루틴으로 퇴근 패턴이 고정되고 있다.
어제도 집에 도착하니 10시가 넘었고, 아기는 씻고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아기 방에 깔린 메모리폼 위에 어머님과 아기가 누워 있을 장면을 상상하며 가방을 내려놓고, 마스크를 벗고, 물을 한잔 들이켰다.
아침 7시에 나가서 밤 10시에 들어오는 하루하루. 간혹 일찍 들어오는 날 재우기 전에 한두 시간 보는 아기는 어쩜 그리 빨리 자라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벌써 이렇게 자랐나 싶은 마음에 괜히 머리도 한번 더 쓰다듬고 엉덩이도 두드려본다.
어머님은 요새 아기가 집에서 뭘 하고 노는지 밥은 잘 먹었는지 하나하나 들려주시는데 그 가운데 내가 몰랐던 아기 모습을 발견할 때면 놀라움과 함께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순간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임원 될 마음 없어. 없기도 하고 되지도 않을 임원 때문이 아니라도 내게 주어진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만 쏟는 게 맞는가 싶다. 이렇게 쏟아도 남들 만큼의 성과를 내는 거니 덜 쏟고 싶다고 덜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매출 확대 같은 기획서를 쓰다 보면 내가 진짜 바라는 건 시간 확대인데라는 생각이 든다.
일주일이 9일이거나 하루가 30시간이면 회사일도 지금처럼 하면서 아기도 조금 더 안아주고 나를 위해 스트레칭도 하고 책도 몇 줄 읽을 수 있을 텐데.
그러다가 문득문득 똑같은 환경 속에서도 outstanding 한 성과 혹은 발전을 이룬 사람들이 생각나 결국 이 모든 게 내 핑계인가 싶어 진다.
얼마 전 하늘나라로 떠난 긴스버그 대법관은 아이 두 명을 키우며 로스쿨을 나오고 교수를 하고 역사에 남을 변론을 하고 대법관이 되었다.
그렇게 대단한 케이스가 아니라도 회사 부장님 중에는 누가 봐도 번듯하게 아이를 기르면서도 치열하게 일해서 임원 물망에 오른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런 케이스 뒤에는 아주 많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포함해 여기에 해당하겠지만, 케이스는 주저앉거나 이탈하거나 하나만 선택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 둘의 차이는 뭘까?
회사 생활이 아니라 취미가 되었든 자아실현이 되었든 육아와 병행하면서 성취감을 갖기란 이다지도 힘든 것인가.
요즘 내 고민은 일주일에 한 시간 한 달에 네 시간 정도라도 나 개인 시간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이다.
회사일도 육아도 아닌 내 자신한테만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격증 공부를 하던 재테크를 하던 다 좋겠지만 설령 아무것도 안 할지언정 내 기분 내 생각만 할 수 있는 시간. 그게 정말 갖고 싶다.
그 시간을 통해 남들이 보기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지 몰라도 나 스스로는 달라질 것 같다. 충전이 될 것 같다. 지식이나 음식으로 가 아니라 나 자신을 스스로 신경 써주는 시간이 될 것 같다.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 재택근무 신청서를 제출했다. 주 1회이긴 해도 나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회사일에서 뒤처질까 봐 두렵고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일을 할 수 있을지 두렵지만 우선 혼자 하는 작은 실험이라고 여기려고 한다. 새로운 시작 혹은 기존 루틴을 이어간다는 선택 어느 것이든 이 실험에서의 경험이 소중하게 쓰일 것 같아서다.
가던 길에서는 안보였던 기회가 돌아가는 길에서는 빼꼼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 수 있고 이 길도 아니라면 또 다른 길을 찾으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