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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마 김작가 Feb 25. 2019

두 언어의 엄마

그건, 엄마가 노력해야지!!

_엄마, <덕분에>는 이탈리아 말로 어떻게 말해야 해?
_덕분에? 덕분에... 잘 모르겠는데...
_왜 몰라? 엄마는 다 알잖아. 어제 축구를 하는데 A가 골을 넣어서 우리가 이겼어. 난 A에게 너 때문에 우리가 이겼어라고 말하고 싶어서 "colpa tua"라고 했어. 그런데 A가 화를 냈어. 너 때문에 이겼다고 말해도 되는 거 아냐?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덕분에 라고 말하는 게 맞는 거 같아서. 그런데 덕분에를 이탈리아 말로 어떻게 말하는지 몰라서....


(여기서 "colpa tua"는 누군가의 잘못이나 실수로 문제가 생겼을 때 네 탓이야!라고 말할 때 쓴다. 이때 너 때문이야!라고 말해도 통하니 아이는 아마도 한국말로 너 때문이야라고 생각하며 이 말을 쓴 것 같다.)


이 것을 시작으로 아이는 "답답해"는어떻게 말해? C가 무슨 말을 했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이야? 봇물 터지듯 질문을 쏟아냈다. 당최 명쾌한 답을 줄 수가 없어 자려고 불까지 끄고 누웠는데 휴대폰을 켜서 구글 번역기를 돌렸다. 아이도 나도 번역기가 알려준 답이 딱 와 닿지 않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될 것 같아 이야기해주었다. 침대에 누워 연습도 했다. 내심 걱정이 되어 아주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물었다.


_한국말처럼 이탈리아 말을 하고 싶은데 잘 안돼서 학교에서 답답해?
_응? 그건 잘 모르겠는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엄마? 엄마는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가 있는 거 알았어?
_어??!!
_난 그 여우한테 잡힌 사람도 봤어!!
_!! (이게 뭔 소리여?!!) 그래? 누군데?
_잊어버렸어.... 어.... 이름이.... 김 씨라고 했는데? 그런데 세상에는 괴물이 없지?
_모르지, 엄마는 본 적 없어. 그런데 있잖아. 이안이는 한국말도 하지 이탈리아 말도 하잖아? 그리고 한국말도 쓰고 읽고 하잖아?
_아니, 나 그건 못하는데?
_아니 아니!! 이름은 쓰잖아!! 그러니까 엄마 말은 이안이 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은 학교에 없어 그러니까 이안이가 최고야. 알겠지?
_근데.... 나 너무 자고 싶은데 그  이야기 내일 다시 하면 안 돼?




육아도 쉽지 않은데 , 이탈리아 말로 육아를 하라니요!!!


최근 아이는 유치원에서 들은 말을 통으로 외어온다. 엄마,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는데 이게 무슨 말이야? 밑도 끝도 없이 문장을 나에게 토해놓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다린다. 왜 선생님이 그런 말을 했는데? 퍼즐을 맞추듯 상황을 조합하고 한참을 이야기한다. 이래서 이렇게 말했고, 이건 이런 뜻이야, 아이에게 답을 준다.

아이를 키우며 나의 이탈리아 말의 세계는 섬세하고 치밀해졌다. 글을 쓰기 위해서 볼펜만 필요했던 세상에 색연필, 사인펜, 형광펜, 크레파스, 물감, 붓이 비집고 들어왔다. 종이에서 공책으로 공책은 줄이 굵거나 좁거나 스프링이 있거나 파일처럼 끼우는 세상이 존재한다고 알려왔다.


마치 세포가 분열하듯 단순했던 이탈리아 말의 세계는 끝도 없이 번식하고 쪼개지고 변형되어 나를 압박해왔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을 땐, 티 아모(Ti amo) 라고 말하면 됐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말이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세상이 열린 거다. (가족에게 사랑한다 말할 땐 ti voglio bene라고 한다.) 

아이가 잠들기 전 물어오는 이탈리아 말은 혹여나 학교에서 답답해 할 아이를 안쓰럽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긴장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꽤 오랜 시간을 그럭저럭 한 이탈리아 말로 버텨오며 그럭저럭 한 수준의 대화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두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럭저럭으로는 버틸 수 없는 세계로 넘어왔다. 아이가 두 언어의 아이로 성장하는 한, 나도 두 언어의 엄마가 되어야만 하는 거다.


머지않아 아이는 나에게 이탈리아 말을 물어오지 않을 거다. 그리고 머지않아 내가 아이에게 이탈리아 말을 묻게 될 거다. 아이는 이겨내야 할 시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자연스럽고 빠르게 혼란의 시간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 속도를 맞추기가 아니, 따라가기에도 버겁다.

일상 속에서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교과서에서는 알려주지 않는 말들을 잡아내려 애쓰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올라오는 엄마들의 채팅방 속의 말들을 배껴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답답해져 오는 마음을 달랜다. 수 없이 흩날리는 말의 조각들을 힘껏 부여잡고 다음 레벨로 올라서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날들이다.


예전에 한 블로그에서 읽었다. 이탈리아에서 자란 중학생 딸과 한국인 아빠가 말다툼을 한다. 자꾸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딸에게 아빠는 화가 났다. _너 한국말을 왜 그런 식으로 해?  아빠의 큰 의미 없이 화가 나 외친 말에 돌아오는 딸의 대답은 나의 심장을 내려앉게 만들었다.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난 한번도 아빠의 이탈리아 말이 이상하다고 말한 적 없어!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탈리아에서 나름 산전수전 겪어가며 수많은 역경을 넘어왔다. 이 정도면 됐다 싶었는데, 곧 초등학교에 들어갈 아이를 생각하니 뛰어넘어야 할 산이 끝이 보이질 않는다. 세상에  겨우 초등학교인데 , 이제 막 시작된 건데, 산을 오르는 긴 여정이 말이다.


이 여정에 끝은 있는 거겠죠?

하루는 아이가 말했다.


 _엄마 그거 알아? A는 정말 축구를 잘해!
 _A의 형이 축구선수인 거 알지? (A의 형은 중학생 축구팀에 속해있다) 그래서 A는 매일 축구를 한데. 집에서도 학교 안 가는 날에도, 이아이는 학교에서 축구하는 날만 하니까, A는 매일매일 하니까 잘하는 거 아닐까? (난 아이가 부러워서 그런 말을 하나 보다 싶어서 내 딴엔 형이 있어 그런 거야 부러워할 것 없어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내 생각에는 A가 축구를 좋아해서 그런 거 같아.
좋아하면 반짝반짝하거든,



 _그렇네, 좋아해서 그런 거네, 이안이도 티라노 사우르스 그리는 거 좋아하잖아. 그래서 이안이 그림이 반짝반짝하잖아. 그렇지?

 아이는 그 아이가 부럽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아이는 나에게 축구를 잘하는 친구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아이는 그 아이가 왜 축구를 잘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매일 축구를 하는 것도 축구를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다. 아이도 안다. 좋아하고 매일 하면 잘하게 된다는 것을.


거봐, 해답은 있다. 매일 노력해야 하는 거다. 아이는 포기 하지 않고 두 언어를 꼭 잡고 매일을 사는데 난 그 매일이 힘겨워 자꾸만 이 정도에서 멈추고 싶어진다. 하지만 노력해야 하는 거다. 아주 오래 꾸준히. 그러면 언젠가 나도 이탈리아 말로 반짝반짝하는 날이 오겠지?

나도 언젠간 우아하게 이탈리아 신문도 책도 거침없이 읽는 날이 오겠지?

아이의 유치원 입구에는 예수상이 서 있다. 반으로 들어가기 전, 아이와 기도를 한다. 언제나 남편과 아이들을 위한 기도를 하다가 슬쩍 내 기도를 해본다.


이태리 말 잘하게 해 주세요.


 아이가 나의 마음 속 기도가 들리기라도 한 듯 말했다. 평소엔 자기 기도만 하고 반으로 들어가버리던 아이가 말이다.


 _엄마, 그건 가짜야. 그 소원은 안 들어줘.


 그 말이 꼭, 그런 기도는 안 들어주거든?!
 그건 엄마가 노력해야지!! 라고 들렸다.
 안다고! 나도 안다고! 누가 몰라?
 괜히 찔려서 애꿎은 아이에게 눈만 흘긴다.
 아는데.... 쉽지 않다고....


written by ian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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