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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르마이 Dec 02. 2023

[단편] 레몬

자작 초간단 소설



'레몬을 씹는 것과 레몬을 씹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별 차이가 없다'라고 생각하며 점심을 먹고 산책로를 걷는다.


미리 검색해 본 오늘의 날씨는 미세먼지도 초미세먼지도 황사도 괜찮다. 햇살은 좀 따갑다. 일요일 지방 혁신도시 산책로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거의 없다. 이런 날씨를 즐기지 않는다면 너무 손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천변을 돌아 나무 그늘 사이로 들어선다.


앞에 늦봄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여자가 걷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펴본다. 머리엔 검은색 벙거지를 깊게 눌러썼다. 상의는 흰색으로 좀 더워 보이는 면 잠바를 걸쳤다. 잠바는 몸집에 비해 커서 소매가 손을 덮고 있다. 손을 일부러 감춘 듯도 하다. 바지는 젊은이들이 많이 입는다는 검은색 삼선 운동복이다. 역시 길이가 길다.
운동복 아랫단을 한 두 번 접었다. 그 아래 흰색 운동화를 신었다.

여인은 걷는 속도가 느리다. 사내는 적당히 빠르게 걷는다. 여인은 뒤에서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서 돌아본다. 푹 눌러쓴 모자와 은색 마스크 사이에 뽀로로 마냥 두툼한 안경이 보인다. 여인은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린다.

사내와 여인의 거리가 더 좁혀진다. 여인은 뒤에서 다가오는 사내에게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사내는 서로의 불편한 마음을 걷어내기 위해 좀 더 빨리 걷는다. 여인을 지나치는 순간 사내는 "안녕하세요?"라고 아랫배에 힘을 주고 목청을 평소보다 조금 더 울려서 말한다. 목소리는 들릴락 말락 하다.


사내는 며칠 전 동네 산엘 갔다가 어떤 사람이 반갑게 던진 안녕하세요란 인사가 떠올랐을 뿐이다. 여인이 멈칫한다.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 곧이어 조심스러운 비난조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절 아세요?"

사내는 안녕하세요라고 무심코 말하기 전에 상상을 했다. 사내는 그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좀 알 것 같아요. 좀 더운 날씨인데 모자를 눌러쓰고 더워 보이는 큰 옷을 입고 있잖아요. 옷을 계절에 맞춰 입지 못 정도로 신경을 많이 쓰이는 게 있거나, 옷에 별로 신경을 안 쓰는 사람일 것 같아요. 옷이 큰걸 보니 남을 의식해서 옷을 살 때도 수줍어서 이 옷 저 옷 고르고 맞춰보고 입어보고 하질 못하실 것 같아요. 그래서 큰 옷을 사버렸는데 바꾸지도 못해서 내 몸에 맞춰서 입기보다 옷에 내 몸을 맞추는 스타일인 것 같네요. 근데 머리는 신경을 많이 쓰셨군요. 갈색으로 염색을 했는데 끝부분은 하얗고 아주 가느다란 세련된 느낌이네요. 마스크도 검은색을 쓰셨어요. 아마 감추고 싶은 것도 많고 부끄러움도 많지만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크신 것 같으세요. 큰 안경을 쓰신 걸 보니 책을 좋아하시거나 학구열이 대단한 분이신 것 같아요. 저도 책은 좋아한답니다. 이 정도면 좀 안다고 할 수 있을 까요?

여인은 나무 그늘에 서 있고 사내는 햇빛 아래 서 있다. 여인은 그늘 속에 다 감춰져 있다. 사내는 하얀 마스크로 덮은 코 위로 시원스러운 눈매와 이마가 드러나 있다. 염색한 듯 만듯한 사내의 짧은 옅은 노란색 머리가 살랑이는 바람을 따라 흔들린다.

"좀 안다고는..."

여인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그늘진 눈빛을 반짝이며 쏘아붙인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죠?"

사내는 레몬을 떠올린다. 이건 레몬을 씹는 상상일 뿐이야. 젠장. 그리고 길에 불쑥 뛰어든 개구리처럼 튀어나가 버린 말을 주워 담기엔 너무 늦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 머릿결, 가냘프게 모자를 빠져나와 흰 잠바 위에 얹혀진, 끝이 하얀 그 가느다란 머릿결 때문이죠. 그 머릿결은 잘 모르겠는 거예요. 저건 뭘까?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제가 조금 전 회사 앞 순댓국 집에서 섞어 국밥을 먹었거든요. 그리고 중간에 화장실도 들렀고요. 그리고 갑자기 그 머릿결을 본 순간 그 말이 하고 싶더군요. 제가 조금 전 순댓국을 먹고 이도 안 닦았지만 키스를 하고 싶어요. 그럼 아주 기분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이 말이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좀 미친놈 같죠. 전 저 앞에 보이는 회사에 다니죠. 일요인데 일이 있어서 나왔죠. 저 회사와 앞에 있는 분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생각을 해버린 거죠. 이런 산책하기 좋은 날에 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요?

정오, 좀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호수를 끼고도는 천변 산책로엔 여전히 사람이 없다. 어디를 둘러봐도 두 사람뿐이다. 아니다. 저기 두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려오고 있다. 따릉하며 사내 뒤를 지나쳐 간다.


여인은 벙거지 챙을 살짝 위로 젖힌다. 밝은 햇살 아래 호기심 많은 아몬드 같은 두 눈에 검은 눈동자가 무심하게 사내를 한 동안 바라본다. 여인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다. 검은색 마스크를 턱 아래로 내려 걸친다. 고개를 살짝 든다. 그리고 음식을 음미하듯 입술에 약간 힘을 주고 지그시 눈을 감는다.


자 맞은편에서 한 번 바라보자. 가로수가 늘어선 호숫가 산책로 저편에 두 남녀가 마주 보며 서있다. 영화를 찍으려나 보다. 사내가 고개를 약간 비틀며 숙인다. 산들거리는 바람이 사내 뒤통수를 간지럽힌다. 침샘은 상큼한 레몬을 한 입 크게 씹을 때처럼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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