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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카피 Apr 19. 2019

01 초록색 양말에 파란색 쓰레빠

 어느 직업에나 부심이 있다. 트레이너에겐 스스로 가꾼 몸에 대한 부심이 있을 것이고,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연예인과 아는 사이라는 '연예인 지인 부심', 혹은 그들의 뒷모습을 아는 데에서 오는 '네가 모르는 걸 나는 알아 부심'이 있을 것이다.


 광고회사에는 힙부심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패션부심에 가깝다. 광고와 패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겠지만, 논리는 그럴듯하다. 광고는 사람을 설득하는 직업이다 – 사람을 설득하는 데엔 겉보기도 매우 중요하다 – 그러므로 광고인은 패션에 신경쓸 줄 알아야 한다.


 실제로 광고회사에는 패션에 한 끗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들에게서 발목이 댕강한 슬랙스와 긴 양말의 어울림, 애플워치의 팔찌로서의 기능, 알 없는 뿔테안경의 효과에 대해 배웠다. 매일 출근 인사와 함께 받아온 ‘오늘의 패션 지적’ 덕이다.


 나의 하루는 굿모닝 인사와 함께 <오늘의 평가>로 시작한다. (평가와 굿모닝이라니 어불성설이 아닌가!) 직업이 직업인지라, 눈썰미도 좋아서 같은 옷을 두 번 입으면 “너 어제 집 안들어갔니?” 같은 외투를 몇 번 입으면 “그건 네 교복이니?” 흰 면바지에 워커를 신으면 “아~발목까진 괜찮았는데~”라는 인사말을 들었다.


 물론 TPO는 중요하다. 광고주를 만나러 가는데 누더기 같은 옷을 입으면 안 된다. (본인이 저명한 광고인일 경우엔 그것이 패션이 된다) 하지만 사람에겐 에너지 총량이 있다. 내가 가진 에너지의 그릇은 밤12시까지 야근 후 아침에 화장을 하고, 옷을 골라 입기에는 너무 작았다. 물론 나도 좀 심하긴 했다. 주말이라고 초록색 양말에 파란색 슬리퍼를 신고 출근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반박할 논리가 생각나지 않는다. 이날은 좀 심했던 것 같다.


 CD님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이란 간사해서, 네가 거렁뱅이처럼 하고 다녀도 만약 네 팔목에 문신이 하나 있다면 그게 네 스타일이 되는 거라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가진 속성과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다른 이야기다.


 자부심의 사전적 뜻은 이러하다. ‘자기자신 또는 자기와 관련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 그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는 마음’. 하지만 이 자부심이 우월감으로 바뀌는 순간 당신은 꼰대가 된다. 언제나 자부심의 근간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상대성에 있으면 안 된다. 내가 잘난 것은 내가 잘난 것. 그것으로 남을 못난이로 만들지 말 것. 만약 지금 당신 곁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자. 남을 짓누르는 자부심을 인정하지 말자.


 내가 광고회사에서 배운 세상을 사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Written by 전(前)카피라이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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