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의 한 횟집. 아는 지인이 데려간 자리로, 처음 보는 사람들이 여섯 명 정도 있었던 그런 모임이었다. 나만 그들 사이의 뉴페이스인 관계로 이런 저런 질문을 받았다. “어떤 일 하세요?” 내가 우물쭈물 대며 대답을 못하자, 지인이 팔꿈치로 나를 툭 쳤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주목 받고 싶어서 그래?” 나는 말했다. “아… 카피라이터요.” 역시나 “오! 멋있다!”라는 말이 돌아온다.
영화의 중요한 장면 앞엔 종종 그 장면을 받쳐주는 공백이 등장한다. 그런데 내가 “카피라이터요.”라는 대답 앞에 비워 뒀던 시간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원하지 않는 상황을 회피하고 싶어서 시간을 좀 보낸 거였다. 너무나 당연한 듯 ‘멋있다!’라고 사람들이 외치는 상황이 부담스럽다. ‘멋있다’는 말을 들으면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그 중 가장 머리 속을 헤집어 놓는 생각은 단연코 이거다. 카피라이터가 멋있는 직업인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카피라이터의 ‘멋’은 창의성에서 온다. 실제로 “오! 멋있다!”라는 말 뒤에 따라 붙는 부가 질문은,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으세요?” 혹은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으세요?”가 많다. 카피라이터가 출판한 책들도 그런 류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카피라이터의 노트를 훔쳐보다..” 뭐 이런 책.. (이 있는 진 모르겠지만)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으세요?”라는 누군가의 질문에 대해 한 번은 솔직하게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솔직히 그렇게 머리에서 벼락 맞듯 생각나는 경우는 거의 없고요, 비메오나 유튜브에 들어가서 동영상을 미친듯이 한.. 1000개 막 이렇게 봐요. 그럼 아 이거랑 저거랑 짜깁기해서 새롭게 만들 수 있겠다. 그러니까 레퍼런스라고 불리고 사실상 모방할 수 있는 영상들을 찾는 거죠. 킥킥. 그리고 카피도 솔직히 잘 생각 안 나고요. 다른 광고 카피 찾아보고 국어사전 미친듯이 뒤져서 하나 그냥 어떻게든 짜내는 건데. 네, 맞아요. 짜내요. 별 거 없죠?”
이 답변에 돌아온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아, 네..”
세상이 말하는 카피라이터의 ‘멋있음’은 야근이 야심한 밤에 가끔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아니, 카피라이터면 아이디어가 무한으로 철철 샘솟는 어떤 그런 창의력이 있어야하는 것 아닌가? 사람들이 다 그래서 멋있다고 하는 거잖아. 근데 왜 난 아무것도 생각 안 나고 거지 같은 걸 F안까지 써 놓은 건가? 어디 가서 자기소개로 “직업은 카피라이터인데요”라고 해도 되는 건가? 이때까지 사람들이 말한 “멋있다”는 말을 너무 공짜로 받아먹은 것 같은데? 그래, 공짜로 받아먹어서 야근으로 벌 받는구나까지 생각이 미친 뒤, 사무실을 탈주하고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면, 그저 노동자 하나가 서있을 뿐.
이 꾀죄죄함도 세상은 ‘창작의 고통’이라는 이름표의 ‘멋’이라고 할 테지만, 나는 어서 짜내고 퇴근하고 싶다. ‘착즙’도 ‘멋’이라면 카피라이터도 ‘멋’이라는 것이 폭발할 것이다!
Written by 전, 카피라이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