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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방진 백조 Jan 08. 2022

심. 쿵. 화이트

  Color명 ‘심쿵 화이트'


도화지가 놓였다.

열두 달, 365개의 칼라가 기다리고 있다.


오늘의 색은 화이트!

‘시작(始作)아, 기분 좋자. 희망 있자!'



21을 보내는 카운트다운은 물론 가족과 함께였다.

언제부터인지도 기억 안 나는, 이 무언의 약속을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다.

몇 해 전 호돌이(My Bro) 녀석이 PM 11:58분에 냅다 뛰어들어와 아슬아슬하게 세이프했을 때 빼고는

이 시간을 늘 함께 차분히 준비한다. 그 해의 케이크를 고르고, 오는 해의 뒷 두 자리 숫자만큼의 초를 꽂는다. 10부터 1까지 두근거려하며 ‘새 날의 축포’와 함께 맞잡은 손을 아버지를 향해 올리며 ‘파이팅!!!’ 새해도 잘해보자! 외친다. 닮은 웃음들 한바탕.

난 이 시간이 좋다. 적당히 친절하게 숙성된 와인 한 모금을 입 안에 머금고 돌릴 때 퍼지는 그윽한 향기 같은. 우리가 건강히 함께 있음이 감사한 그런 편안함이다.


올해는 랜선 카운트다운을 했다.

엄마와 나는 우리 집에, 호돌이는 호순(Baby♥로 저장되어 있는 여친)이와 있었기에 영상통화로 새해인사를 나눴다. 신선하다. 이 방법도 재밌다. 전화를 끊고, 엄마와 나는 부둥켜안고. 서로 '고맙다느니. 건강하시라느니. 살찌지 말라느니. 돈벼락 맞자느니. 너나 부자 되고 잘 살라느니.' 장난스러운 대화를 나누며 케이크를 가열게 푹!   


올해의 케이크는 당근 케이크. 소복이 쌓인 아이보리색 크림치즈와 계피향이 사르르르~락.

첫 입의 그 달콤함은. 일 년 내내 우리의 매일매일이 이러하길 바라게 되는 맛이다.  


조금 후에 집에 들어온 호돌에게 또 한 번 해피 뉴 이어 인사를 건네고,

다 같이 소파에 쪼르륵 앉아 케이크를 먹으며 영화를 보며 21년을 보냈다.

보통의 마지막 날 모습과 같아 행복한, 한 해 마무리 풍경.



새 날의 아침. 사랑스러운 호순이가 22년 속초의 첫 해를 담은 사진을 보내줬다.

하얗고 뽀얀 떡국은 대기 중. 엄마와의 가벼운 아침 산책으로 새해 초하룻날을 열어본다.

이른 아침 공기가 온통 하얗다.

무색. 무취의 2022 첫 바람이 뇌를 씻어준다 (상쾌해. 고마워)


동네를 빙 천천한 걸음으로 훑으며 숲길로 접어든다.

전나무에 다리 올리고 스트레칭 - 예쁜 돌고래 벽화 앞에서 찰칵 - 배드민턴 치는 젊은 부부를 지나 - 새로 생긴 우동 가게 구경 - '사람은 책을 만든다'는 서점 사진을 찍어, 책을 사랑하는 친구에게 새해인사와 함께 보내고 – 핸드메이드 액세서리 가게 앞 가판대 위 헤어 집게핀에 눈이 잠시 팔렸다가 -  떡국과 함께 구울 고기로 무엇을 준비하셨는지 어머니 말씀을 들으며, 흑맥주를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벌써 흰 건물 도넛 가게에까지 도착했다. 쌀쌀한데도 일찌감치 나와 도넛 가게 앞에 줄 서고 있는 달달 커플들을 보니 달콤한 미소가 지어진다.


알싸하고 차가운 하얀 공기.

여지없이 1월의 칼라는 화이트 구나.


화이트. 아직 그려지지 않은 한 해의 첫 달.




내가 만났던 화이트들이 떠오른다.
‘초현실적인, 마법 같은, 웅장한, 경이로운, 가슴 벅찬, 아름다운, 설레는, 희망'의
화이트들.



# 캐나다 밴쿠버 어학연수 시절, 홈스테이 가족과 휘슬러(Whistler, 2010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스키여행을 갔다. 세계 3대 스키장인 휘슬러-블랙콤의 대표적인 슬로프, 이름마저 아름다운 7th Heaven (신이 사는 멀고도 신비로운 천국이라는 의미)에 도착했을 때 압도적인 겨울왕국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바로 위 하늘에서 내게 로프 하나만 던져주면 올라가서 천국 구경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블랙콤산(Mt. Blackcomb)에는 혼자 갔기에 그 멋진 설경을 전부 눈으로만 흡입하고 있는데, 탐 크루즈같이 생긴 아저씨(그렇게 믿기로)가 불쑥 다가와 사진을 찍어주셨다. 이적님의 노래 ♬하늘을 달리다 를 반복해서 들으며, 해발 2,284m에서 새하얀 벌판과 울창한 나무 숲 사이를 요리조리 헤치며 내려오는 1시간 내내 날아갈 듯 행복했다.

Whistler 의 화이트


# 혼자 한 겨울 유럽여행 중 스위스 루체른 리기산(Mt. Rigi, 세계 최초의 산악열차가 설치된 ‘산들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산) 정상에서 홀로 되었다. 산악열차를 타고 오른 사람도 네댓 명 정도뿐이긴 했지만, 열차에서 내리고 나니 다들 어딜 간 건지. 사방이 새하양. 보이는 것은 오로지 온몸을 때리는 눈보라와 나 하나뿐. ‘난 이제 여기서 죽는구나. 해발 1,797m 스위스 산 위에서 눈 속에 파묻혀 생을 마감하는구나’ 했었다. 지금도 어떻게 내려왔는지 불가사의다.  


# 글라라 대모님과 갔던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눈. 얼음축제와 노보리베츠 지옥온천, 하코다테의 거리들, 오타루의 오르골 가게와 운하 옆에서 얼음 축제를 준비하던 일본 소녀들과의 늦은 밤 대화는 반짝반짝 빛나는 우리들만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의 유명한 첫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와

미우라 아야코 ‘빙점’의 섬세하고 얼음 같은 문장들.


# 영화 <러브레터 Love Letter, 1995>의 나카야마 미호와 영화 <얼라이브 Alive, 1993>의 에단 호크.


# 유리 통창을 통해 들어오는 오후 햇살을 한가득 맞으며, 일어선 채 골똘히 업무 서류를 보고 있던, 내 여린 심장을 뛰게 하던, 화이트 셔츠의 내 마음속 키다리 아저씨.


그리고 이어진 화이트에 대한 기억은, 

바로 ‘나’ 다.


어느 겨울. 한강을 따라 걷다가 갑자기 뛰어야 할 것만 같은 충동이 일었다.

흰 티셔츠를 입고 있던 내가 순간 전력 질주를 했다.

몇 미터 못 가고 헉헉 대며 멈췄을 때,

‘심’장이 ‘쿵’쾅거리고, 하얀 입김이 쏟아졌다.

내 심장 소리가 들리고, 내 심장이 매우 가깝게 느껴졌다.


왠지. 모든 걸. 모든 것을 다 -

전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앞서 걸어 나가시던 엄마가 뒤돌아보며 내게 빨리 오라고 손짓하신다.

후훗. 엄마의 <심. 쿵. 화이트>는? 내가 알고 있다.  


언제나 그 말씀을 하실 때면, 입가에 웃음끼가 어리는데,   

그것은 두 분의 연애시절,

‘아빠의 화이트 셔츠 소매 걷어 올리기’이다.


지적인 문학청년, 20대의 아빠가.  

화이트 셔츠의 소매단을 ‘척. 척. 척’ 3번 접어 걷어올리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었다고 하셨다.

3번. ‘척. 척. 척’


그 시절의 엄마와 아빠를 보고 싶다.

영화 <백 투 더 퓨처 Back to the future, 1985>에서 처럼.



현재 나를 설레게 하는 ‘심. 쿵. 화이트’는 단연,

나의 애마, 로씨이다.


즐거운 여행길, 힘겨운 해결 길 에도 함께였다.

비바람 몰아치는, 앞이 안 보이던 어두컴컴한 처음 가는 밤길도 함께라 안 무서웠다.

로씨 안에서 쉬고, 울고, 웃었다.  


나의 보디가드, <심. 쿵. 화이트, 마이 로씨난테>

넌 정말 24시간, 86,400초 심. 쿵. 해!

내일 네 화이트를 찾아줄게.

작년 내리 열심히 달리느라, 네게 받힌 벌레들도 떼자.  

시원하게 씻고 목욕하고 나면 네 캔디화이트 칼라도 잘 보일 거야!


그리고선 다시 써보자.

우리의 2022년 '심. 쿵. 화이트 로드~'



1월은 도화지다.
1월은 시작이다.
1월은 화이트다.
 
1월은 내가 써내려 갈 픽션과 논픽션의 첫 장이다.

그래서 1월은,
하얗게 피어나는 희망이다.



                              ♬ W.H.I.T.E / 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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