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 도도도. 톡톡. 톡. 도로록. 톡. 토로 톡. 톡. 톡.'
무슨 소리인가 싶어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가로로 기다란 유리창틀에서 빗님들이 퐁퐁(방방이)을 뛰고 있다.
빗방울들이 창틀에 부딪혔다가 부서지며 위로 튀어 오르는 모습이.
악보의 스. 타. 카. 토. 주법 같이 경. 쾌. 하다.
*Staccato(이탈리아어) : 음의 길이를 줄여 짧게 연주하라는 악상 기호
사무실 책상 바로 옆 창에서 그렇게들 부서졌다 점핑했다 꺄르르 대고 있는 것을 보니,
수분끼를 잔뜩 품고 있던 싱그러운 6월이,
드디어 장맛비를 등장시킨 것이 실감 난다.
그렇게 비는, 세차졌다가 조용해졌다가를 반복하고 있는데,
갑자기. 빗소리의 매끄러운 질서 정연함이 <브람스의 교향곡>처럼 들린다.
오~ 맙소사! 눈을 감고 들으니 더더욱 그렇다.
비 내음 가득한 창 밖에는 꼬리를 단 음표들이 비구름을 타고 넘실대고 있었다.
서너 달째, 흠뻑, 클래식 음악에 젖어 살고 있는 중이다.
나의 애마 속 라디오 주파수가 클래식 FM 93.1로 고정되어 있은 지 이미 오래고,
초등학교 때 플루트를 배웠기에 어릴 적부터 클래식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최근 이렇게, 작정하고 젖어있기는 오랜만이었다.
이사 전, 쫙 뻗은 직선 길에는 ‘종종 러닝’용 Rock Spirit 이 필요하더니.
이사 후, 구불구불한 오르내리막 길에서는 ‘느긋 워킹’용 Classic 이 어울리게 된 이유 같기도 했다.
carino e adoràbile 귀엽고 사랑스러운
꽉 찬 머릿속 빈 공간을 파고 들어오는 클래식 음악은, 잊고 지냈던 지난 추억을 데려오기도 한다.
. 초등학교 플루트부. 내 발표회 곡은 <하이든의 세레나데>였다. 평화로웠던 이 곡이 단조롭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연습하면서 좀 지루해했었던 것 같다. 그래도 발표회 후에는 잘 불었다고 선생님과 엄마, 친구 어머니들께 칭찬도 꽤 받았는데, 정작 나는 유나와 미향이, 정란이랑 찍은 뒤풀이 뷔페 식사 사진 속에서 꽤나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이쁘게 찍힐 걸. 볼 때마다 아쉽다.
. 중학교 체육대회 때 우리 반 춤곡은 캉캉이었다. 안무는 무용을 배우던 지연이가, 프릴이 잔뜩 달린 드레스는 여학생 인원 전체가 교실바닥에 빙 쭈그리고들 앉아 수다 떨며 핸드메이드.(빨래터 아낙네들 같다며 서로 웃느라 정신이 없던 우리는, 정신 놓고 캉캉을 춘 후 1등을 했다) 음악과 연습 스케줄은 반장인 내가 맡았다. 일주일에 종류를 가리지 않고 테이프를 막 2~3개씩 사던 시절인데, 곡 제목이 기억이 안 나, 학교 앞 레코드 가게 사장 아저씨 앞에서 “따안~ 따라라라. 딴. 따. 따라라라~” 흥얼거리며 이 음악을 달라고 하니, 빼곡히 꽂혀있던 테이프들 사이에서 <오펜바흐의 천국과 지옥>을 탁 꺼내 주셨다. 이 광경을 보며 미소 짓던 아빠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 대학생 때는 잠시 학교 오케스트라 단원이었다. ‘전국 대학생 음악 경연대회’에 참가했었는데, 우리 학교가 은상을 수상했다. 그때 연주했던 곡이 그 유명한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왈츠 2번> . 요새도 이 음악을 들으면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 속 왈츠 장면과 오케스트라 단원 전체가 맞춰 입었던 빨간 폴로 셔츠가 생각난다.
♪ 하이든 . 오펜바흐 . 쇼스타코비치
vivo e libero 생기 있고 자유로운
. 첼로와 피아노 선율로 6월을 열었다. 동생, JK가 다니는 회사가 만든 클래식 전문 공연장에서는 매달 공연을 하는데, 요새 핫한 인기 첼리스트와 피아니스트가 연주한다고 하여 부랴부랴 티켓을 부탁했던 것이다. <라흐마니노프 전주곡>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멘델스존의 첼로 소나타>. 처음 들어보는 음악이 주는 낯선 느낌이 좋다.
. 매일 아침 눈뜨자마자 켜는 클래식 방송이 있다. 전문 음악 앱인데 공영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하는 클래식 해설가 이자 금관 앙상블의 리더이기도 한 호스트(DJ)가 라이브로 진행한다. 바로바로 채팅이 가능해서 좋아하는 곡을 틀어줄 때 박수 이모티콘을 보낸다던지 아는 곡들에 대해 짧게 거들기도 했었다. 신청곡을 메일로 보내면 호스트께서 직접 쓰신 책을 준다기에 아주 오래전 일본 해군 관악대 지휘자 분과 편곡자분이 한국 해군 관악대와의 협주를 위해 오셨을 때, 통역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억을 살려, 브라스 밴드(금관악기로 구성된 대규모 합주 형태)의 곡과 좋아하는 여성 트럼페터의 연주곡, 탄광촌 밴드를 배경으로 한 ‘영화, 브레스트 오프(Brassed off)’를 소개해드렸다. 그 외 모차르트와 누나 난넬의 일화랄지 좋아하는 작곡가들의 이야기를 덧붙여 음악을 신청하며 호스트와 메일을 주고받기를 여러 차례. 내 신청곡들은 5월 중순부터 약 한 달간 일주일에 2,3곡씩 소개되었는데, 거의 내 신청곡 특집 같았다. 난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내가 거의 방송을 기획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호스트네 금관 앙상블이 이틀간 직장인들을 위해 점심시간에 짧게 콘서트를 한다는 것이다. 듣자 하니 장소가 동생네 회사 앞 광장이었다. 내가 맨날 듣는 음악방송의 DJ가 너의 회사 앞에서 공연을 한다 했더니 그 콘서트 담당자가 '본인'이랜다. 이런 우연이 있나! 내 이름을 아실 테니 인사라도 나눠봐라 했더니 바빠서 그건 어렵겠단다. 몇 시간 후, 동생은 호스트 분과 함께 찍은 사진과 연주 영상을 보내왔다. '매우 영광'이라는 말과 함께. 이 우연이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다며 호스트는 그 다음 날 아침에 이 일을 언급했다.
나는 연주 두 번째 날.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부리나케 동생네 회사로 갔다. 태양이 작열하다 못해 터지려고 하던 더위였다. 도착해서 전화하니 동생이 연차랜다. 극진한 대접을 해주겠다던 동생네 팀장과는 인사만 나눴다. 그때 오프라인에서 처음 만난 호스트분은 나 덕분에 회사에서 스타 대접을 받았다며, 다음번에 꼭 더 즐거운 음악회에 초대하겠다신다. 훈훈한 인사를 짧게 나누고 연주회를 감상하려는데. 머리 위에 바로 이글거리는 태양이 있었다. 정오였다. 다른 관객들은 건물 처마 밑 그늘로 피해서 연주를 보는데, 나만이라도 관객석에 앉아있어야 한다는 의리로, 뙤약볕 아래 플라스틱 의자에서 50분을 참아내사, 검게 그을린 팔뚝과 주근깨, 따갑게 달궈진 뺨을 얻었다. 음악이 귓구멍으로 들어가는지, 땀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정수리를 달구던 무더위 덕에 음악에는 하나도 집중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때마침 겨울왕국의 주제가를 연주하는데 정말 그 왕국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도 공연 후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더위를 제대로 먹은 탓에 저녁까지도 정신이 혼미했지만, 그날 바로 호스트께 사진과 연주 동영상을 모두 보내드리며, 아무도 준 적 없는 미션을 클리어했다. 왠지 모르게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그날 이후 채팅방은 더 활기 있어지고, 호스트 분은 음악회 초대 등 오프라인 미팅을 계획 중이시다. 그러나 나는 그날의 기억이 너무 뜨겁게 민망해서, 나름의 방송 참여활동을 중단하고 클래식 음악에 자체 소강 모드를 가동하고 있던 차였다.
바로 그때, 다시금 내 온 하루를 클래식으로 물들게 한 계기가 오고 말았으니!
‘임윤찬 씨의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소식이었다.!
appassionato e romantico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선율에 젖어 전율을 느끼며
조성진 씨의 모차르트 미발표곡 세계 초연 영상을 챙겨 본다거나, 선우예권 씨의 파워풀한 연주 영상을 보며,
두 연주자의 다른 매력을 스스로 찾아보는 재미를 느껴보곤 했었는데, 임윤찬 씨는 아직 10대 영재 소년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는 지금 신드롬의 주역이 되어있다.
'반 클라이번 대회 60년 역사상 최초. 18살 최연소 우승. 외국에서 공부해 본 적 없는 순수 국내파 피아노 천재'라는 타이틀을 달고 클래식계의 찬사를 받으며, 전 세계 클래식인들에게 ‘윤찬 앓이’를 퍼트리고 있다.
대회 연주 영상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클래식 전문 지식이 없는 내가 봐도, 저절로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임윤찬 씨는 이미,
화려한 수식어들 그 ‘너머’에 있는 듯했다.
그의 손가락에서 펼쳐진 모차르트, 리스트, 베토벤, 라흐마니노프 곡의 연주는 각기 장르가 다른 명작 영화와도 같았다. 그 연주 곳곳에 드라마틱한 감정들이 입체적으로 살아 숨 쉬었다.
강하면서도 절제력 있는 표현, 피아노 건반 위에 내려앉는 섬세한 손가락 터치, 사려 깊게 연구하는 듯한 표정, 순수한 구도자의 사색 같은 진지한 눈빛, 지적 아우라는 그의 모든 연주의 순간들에 숨을 죽이고 몰입하게 만들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지휘자 마린 알솝(Marin Alsop)과 그녀가 이끄는 오케스트라, 임윤찬의 따뜻한 합(合), 어우러짐이 일궈낸 연주로. 보고 있으면 자꾸 뭉클해진다.
눈 뗄 수 없게 하는 연주는 훌륭한 차원을 넘어 전율을 느끼게 했고, 마린 알솝 지휘자가 임윤찬 씨와 나누는 말없는 교감과, 밝게 웃거나, 눈물을 보이는 모습들은 '픽션 이상'이었다. 그녀는 임윤찬과의 협연이 자신 '음악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 영화, 더 컨덕터(The Conductor)’의 실제 모델이라는 마린 알솝은 남성 중심의 지휘자 세계를 뚫고 우뚝 선 여성 최초 상임지휘자, 카리스마 넘치는 거장이다.
두 사람 모두 이렇게 근사한 스토리를 갖고 있으니, 연주가 한 편의 영화 같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라흐마니노프 연주가 끝난 후, 두 팔 벌려 이 젊은 연주자를 안아주는 그녀의 커다란 모습이 아름다웠다.
# Scene _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지휘자 마린 알솝 & 오케스트라 주연의 감동 음악 스토리
피아노의 어려운 테크닉이 모두 다 들어가 있다는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12곡>을 65분간 연주하는 모습은 가히 압권이었다.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가 피어난다. 11번, 12번 곡을 치는 후반부로 갈 때쯤, 그의 덥수룩한 머리카락은 온갖 격정과 열정이 버무려진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버렸고, 마지막 건반을 누를 때 얼굴을 타고 내려와 턱에 맺혔던 땀방울 하나는, 모든 것을 다 쏟아부은 연주를 상징하는 마침표 같았다.
감동을 받았다.
이 젊은 음악가로 인해,
땀과 열정, 몰입, 노력, 끈기 같은.
가슴 떨리게 하는 단어들의 그 묵진한 가치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피아노에 몰입하여 혼연일체 되는 것이 부러웠다.
시대를 뛰어넘어 작곡가들과 소통하려는 듯한 모습이 겸손해 보였다.
음악을 고귀하게 여기는 듯한 태도가 진실되어 보였다.
환희로 화답한 그간의 고민과 사색의 깊이가 궁금했다.
“음악가들은 참 낭만적으로 살 것 같아.”
언젠가 조수미 성악가의 다큐를 함께 보다가 JK가 말했다.
항상 입버릇처럼 다음 생에는 뮤지션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하곤 하던 나도,
“그렇지? 유럽을 여행하면서 고전, 낭만주의 시대 음악들, 엘레강스한 궁정홀 같은 데서 연주하고. 밖에 나가면 18,19세기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있고.” 라며 음악가의 삶을 동경해 왔다.
피아니스트는 카멜레온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임윤찬 씨도 이제 세계 각국을 돌며 그만의 해석을 입힌 연주를 하게 되겠지. 항상 좋을 수는 없겠지만, 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지금 모습의 '그'라면 분명 낭만적인 음악 수련을 잘해나갈 것 같다.
나는 많은 것들에 지적 호기심이 많아 여러 분야에 에너지를 뻗치고 있지만,
그래서 때때로,
오로지 한 가지에만 미치는, 한 길 몰입의 파도를 탄 이들처럼 해야 하나 고민도 되지만.
나는 다양한 것들에 따뜻한 시선을 두는,
'다채로운 낭만주의자' 가 되기로 결심해본다.
땀과 열정, 몰입을 다양한 곳에 낭만적인 시선으로 담으려 노력하는,
그런 나의 삶도 끝까지 응원해보고 싶다.
그렇게,
위대한 음악가들이 만드는 낭만적인 음악을 들으면,
낭만적 말을 하게 되고,
낭만적 생각을 하게 되고,
낭만적 영혼을 담은 무언가를 창조하게 되고,
낭만적 인생도 살 수 있겠지?
비를 기다리고 있다.
비와 함께 그 음표들이 찾아오면,
나는 컴퓨터의 검은 키보드 위를 누비는
사무실의 피아니스트가 된다.
키보드를 누르는 강약과 완급을 조절하며
우다다다 다다닥~
경쾌한 소리를 내뿜으며 달려 나가는 -
속도와 쉼표가 절묘하게 가미된 키보드질.
마침표를 찍을 때는,
있는 힘껏 팔뚝을 높이~ 드높이~ 올리리!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다가 -
강하고 힘차게 Forza e Forte
내리꽂으며!
Enter ↙
딱!!!
어느 밤, 남산이 보이는 커다란 창에 그 비가 오면,
와인잔에 보랏빛 빗물을 따르고.
피아니스트 임의
바흐, 스크라빈, 쇼팽, 모차르트, 리스트, 베토벤, 라흐마니노프를 만나리!
아, 이토록 장맛비를 사랑한 적이 있었던가!
그야말로 낭만적 -
낭만적 장맛비다.
# 초절기교 연습곡 12곡에는 각각 제목이 있다. '4번 마제파, 5번 도깨비불, 8번 사냥, 12번 눈보라'가 특히 어렵다고 한다. * 초절기교 연습곡 : 초월적인, 초절정의 기교를 필요로 하는 연습곡
# Scene _ 열정적 구도자의 연주 모습
* 글, 낭만적 장마 _ 배경 악보는 Mozart의 친필 악보 ♬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