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방진 백조 Aug 18. 2022

훌라, 오렌지

 알로하 Aloha 가 흐르게 하라


눈을 떴다. 아침이다. 저절로 쉬어지는 공기처럼. 아침엔 눈이 떠진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건가.’ 내게 주어진 소중한 하루를 감사하며 시작해도 모자를 판국에, 한 때 유행했던 책 제목 같은 문장이 아침에 처음으로 든 생각이라니. 밑도 끝도 없다며 스스로 민망해하고 있자니, 초인종이 울린다. 깡마른 소독 여사님이 활짝 웃고 계시다. 한 달 전 추가 소독 때 뵈었던 분이다. 집을 못 치웠다며 긁적이는 내게 "아이고~ 이 집이 제일 깨끗해. 대충 하고 살아요.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아." 후다닥 끝내신 사님의 호주머니에 초록빛 청포도 사탕 3알을 넣어드리니 또 주시냐며 호호 웃으신다. "저 이제 3달 후에 올 거예요." "3달 뒤요? 그러면 가을이에요. 겨울이에요?" 골똘한 표정으로 머리 위 헤어밴드처럼 하고 있던 선글라스를 만지작 거리는 것을 흘끗 보시고는, 한번 더 호호 웃으시며 건강하게 지내시다가 보자는 인사를 남기며 휘리릭 사라지신다.

뭐지. 이 환기되는 기분은? 마음이 살짝 가벼워진다.


냉수를 한 모금 마시고, 어제 듣던 플레이 리스트 중 한 곡을 튼다.

물세수만 한 매우 청순한 얼굴에, 3달 후면 허리에 닿아있을 법한 긴 머리는 아주 자유롭게 뻗쳐있다.

청록색 면 레깅스를 입은 다리 무릎을 살짝 굽히고, 골반을 밀어내며.

왼쪽, 오른쪽. 두 번씩 ~왔~다~갔~다~    


'훌라. Hula'를 춘다. 


푸르르게 펼쳐진 바다 위 파도 소리. 게으른 듯한 우쿨렐레 줄 튕기는 소리.

키 큰 야자수 잎들이 부딪히는 소리. 몰려갔다 몰려오는 모래알 소리.   

하와이 음악이 잔잔히 퍼지며,

온 집안에 '알로하. Aloha' 흐른다.  


여름을 장식했던 많은 비는 이제 그친 모양이다.


'섹시, 초록'이던 나의 여름이,

'훌라, 오렌지' 머금게 된 22년의 여름도.. 이렇게 저물어 가고 있다.




선생님이 가져온 낱말 카드들이 바닥에 진열되었다.


'태양-라, 바다-카이, 물고기-이아, 꽃-푸아, 새-마누, 별-호쿠, 무지개-아누에누에'

유심히 하나하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와이어로 발음해 보다가,

“저 마히나 Mahina 할래요. ‘마히나’ 할게요.” 뜻과 발음이 딱 맘에 들었다.

평소 말없이 조용한 해진 씨가 ‘진짜 어울려요.’ 라며 거든다.

<릴로 앤 스티치> 디즈니 영화를 보고 훌라가 배우고 싶어 왔다던 얌전하고 온화한 해진 씨.

그녀가 말하니 백 퍼센트 신뢰가 간다.


그리하여 나는 ‘마히나 Mahina’가 되었다. 하와이어로 마히나는 ‘달. Moon이다.

달까지 되고 나니. 하와이의 오렌지빛 하늘의 묘한 기운을 이미 받은 것 같이

*달달* 해진다 *마히나 마히나* 해진다.


오늘의 시작은 '훌라 샤워'로.

파도 소리에 맞춰 살랑살랑 몸을 움직이며 손으로 자연을 만든다.


하늘에 태양을 만든다.

별을 띄운다.  

바다를 펼치고 파도 물결을 일게 한다.  


머리 위에 산들바람을 만들며 살포시 눈을 감으니 진짜 바람이 부는 듯하다.


문자가 없던 고대 하와이에서는 이렇게 수화로 대화를 했다지.

손동작과 몸짓들. 우리 몸이 만드는 자연의 언어.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이야기들.


바람. 꽃. 비. 별. 달. 해가 눈앞에 펼쳐진다.


훌라 배우기 3일 차였다.  




훌라는 내게 항상 오렌지빛이었다. 내가 5살, 지금은 두 딸의 엄마가 된 사촌동생 지연이가 4살 때이다.

주스는 마시고 오렌지 알맹이는 터트려 먹으라는 '쌕쌕 오렌지' 광고 훌라를 아기 지연이가 어찌나 앙증맞게 따라 잘 추던지. 어른들 모두를 즐겁게 했다. 그때 생각했다. 춤은 안 되겠구나. 그 이후로는 포장 겉면에 훌라 추는 여자아이 그림이 있었던, 오렌지색 '쌕쌕 바' 정말 좋아했다. 오렌지 3개가 겹쳐있는 모양이었는데 겉의 얇은 얼음을 깨어물면 안쪽에 찐한 주홍색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얼음 셔벗 쨈 같은 것이 들어 있는. '사각사각. 달콤'. 훌라는 내게 언제나 상큼한 오렌지 빛깔이다!  



훌라 원데이 클래스를 관심 목록에 저장해둔 것은 1년도 넘었다. 아주 심플한 이유에서였는데. 언제고 하와이는 꼭 갈 것이고, 그 지상낙원에서는 어디에서든 훌라를 추고 있다는데, 흥에 겨워진 어느 때, 훌라를 만나면 그 무브에 어울릴 수 있어야 나만의 하와이를 더 찐하게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움직임이 부드러운 듯하여 엄마께도 큰 무리가 되지 않을 것 같아 함께 배워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기회가 오고야 말았다. 박진감 있게 날아온 엄마의 톡. '훌라춤 개강한대. 빨리 입금해! 너랑 나랑 2명!’ 출근길 언뜻 하와이 훌라 수강생 모집 플래카드를 사회복지재단 건물에서 본 것 같은데 어머니께 마침 딱 낚아채진 모양이었다. 엄마와 내가 1,2번 신청자. 요새 따로 살아서 일부러 시간을 내어 만나야 하는데, 수업을 함께 들으면 일주일에 1번은 만날 수 있으니 조금은 안심이 되는 고마운 기회이면서, 훗날 분명. 깔깔. 추억할 거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이렇게 또. 웃음 추억 하나를 저축해 놓는 것이다.

훌라 클래스는 최소 인원이 모일 때까지 1주일을 더 기다린 후에 개강했다.


공부하지 않고 갔다. 하와이의 역사, 폴리네시아의 범위, 훌라의 뜻 등. 예전 같았으면 미리 알아갔을 것들을 이번에는 비우고 갔다. 1년여 전, 찾아 저장해뒀던 아름다운 훌라 영상과 음악들도 다시 열어보지 않았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맞으나, 모르는 만큼 느낄 수도 있으리라. (대신 질문의 여왕이 되기는 했지만)


“알로하가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했는데, 알로하는 무슨 뜻이에요? “

한나쌤은 정말 좋은 질문이라며 각각의 알파벳의 뜻을 적은 카드를 진열해 보인다.


Akahai (아카하이): 배려, 친절, 부드러움, 관대  Kindness

Lokahi (로카히): 조화. 통합  Harmony, Unity

Olu’olu (올루올루): 기쁨. 화합  Joy, Agreeable

Ha’aha’a (하아하아): 겸손, 겸허  Modesty, Humility

Ahonui (아호누이): 인내, 참을성  Patience


" 알로하는 하와이 사람들의 삶 자체. 정체성이에요.  사랑, 화합, 존중의 의미를 담고 있어요.

그래서 만날 때 헤어질 때 모두 알로하라고 인사해요."


1일 차 시작 날, 제일 먼저 강의실에 도착한 사람은 나였다.  

“안녕하세요. 한나쌤이시죠? 잘 부탁드려요!” 본인 활동명을 어떻게 아시냐며 깜짝 놀라면서도

미소 가득한 밝고 활기찬 환대. 그것이 알로하였다.    

두 번째 도착하신 분은 우리 엄마. 3명의 처음 만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기운 치고 너무도 자연스럽고

긍정적이며 따뜻했던 분위기. 이제 와서 보니, 그것 역시도 알로하였다.


그렇게 점점. 알로하가 내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훌라에 맞춰 출 첫 곡은 ♬Pearly Shells 였다. 엄마는 듣자마자 옛날가수 박재란 씨가 ♪진주조개잡이 라는 제목으로 번안해서 부른 곡이라고 하셨다. 원곡 내용인즉슨, 바닷가의 수많은 진주조개보다도 너를 사랑한다는. 참 황송스런 내용이다.


엉금엉금. 아장아장. 춤 배우기가 시작되었다. 내용은 차치하고, 제각각 각자의 춤을 챙기느라 웃겨 죽겠다.

왼발 나가야 되면 오른발이 나가고, 오른손을 뻗어야 하면 왼손이 뻗쳐졌다.

모두 왼쪽으로 도는데 혼자만 오른쪽으로 도는 것도 꺄르르 감이다.

스텝이 엉키고 꼬일수록 알로하가 나오니 원~. 정말 분위기 '알로하'다.


춤을 틀리지 않고 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는 그것인데.

자연스럽게 풍기는 어떤 그루브. 여유와 멋스러움.

전체적으로 훌라를 추는 모습이 ‘긍정적이고 밝아, 알로하 그 자체’ 라며 선생님의 찬사를 받은 이는, 어머니. 엄마의 훌라였다.  

춤을 이쁘게 춘다는 칭찬도 좋지만, 나는 왠지 이 말이 더 뭉클하게 다가왔다.

이것은 어쩌면,  삶을 마주하는 태도. 그 정신, 스피릿(Spirit) 일 것이다.


왼쪽, 오른쪽 스텝을 밟아가며 서로 열심히 진주조개도 줍고, 음료수와 과자도 나눠먹으며 어려워하고 헷갈려하며 훌라를 배웠다. 수업을 시작하고 끝날 때마다 샤카 사인 (Shaka Sign : 엄지와 새끼손가락만 펴고 나머지 세 손가락들은 접은 채 손등을 상대방에게 보이며 손목을 가볍게 흔들어하는 인사)으로 반갑게 인사했다.

미스 커뮤니케이션으로 해진 씨 남편 1명만이 관객으로 오게 되었던, 책장을 배경으로 한 도서관에서의 공연까지. 다 같이 깔깔 호호 웃으며 끝이 났다.


우리 각자의 알로하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던 시간들. 나는 이 과정에 훌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배려와 존중. 따뜻하고 친절한 합들이. 훌라의 첫인상. 나의 첫 번째 훌라다.





엄마와 함께 한 7번의 수업.


공연 전날, 춤 동작이 하나도 기억 안 난다는 엄마에게.

시험날 공부한 것이 하나도 기억 안 나면 어쩌나 걱정하던 친구를 안심시키던 것처럼.

'괜찮아. 나도 그래. 다 그래'라고 말했다.


엄마와 또 하나의 추억이 만들어졌다.

여백을 남긴, 공유된 시간.

그 속의 훌라. 속의 하와이.


자연스럽게 알로하를 만나고, 꽉 찬 기분으로 내딛는 하와이로의 첫 발.

모녀의 여름은 이렇게 ‘알로하!' 




훌라는 상상할 수 있어서 좋다.


내가 태양을 만들고, 바람을 만든다.  

원하는 크기만큼의 파도를, 물결을 만든다.


마음이 심상치 않은 어느 밤에는,

새로운 밤하늘을 만든다.

내가 만든 그 하늘에 걱정과 근심을 날려 보낸다.


별을 환하게 꽂아본다.

달을 두 개 달아본다.


해변의 조개를 줍고, 모래알을 쌓고.

상어 여신을 만난다.

나무를 심고, 새를 날게 한다.   

손짓으로. 몸짓으로.


그려간다. 그림을.

그리는 춤, 훌라! 



나는 과연,

훌라를 더 배우게 될 것인가? 여기서 멈추게 될 것인가?


어찌 되든 뭐 어떠리.


흘러가는 대로 알로하! Aloha!

너를 만난 것은 마할로! Mahalo! (감사합니다)


Pearly Shells를 트니,

하와이 파도와 알로하가 찾아온다.


알로하 스피릿 Aloha Spirit을 담아 여름을 보내며 ~

알로하, Hula , 알로하, Hawaii

알로하, Mahina! 







내 인생 첫 훌라 곡. ♬ Pearly Shells (Nathan Aweau 가 부른 버전. 빈티지풍 하와이스런 앨범이 정겹다) 

어디서든 이 음악이 들리면 훌라 스텝이 시작될 것만 같다.  

  

 그리고 &...

 알로하 공기를 집안 가득 채운 뒤, 이어지는 상상.

 * 평화롭고 여유로운 바닷빛 하늘. 맞닿아 있는 바다. 싱그러운 물향이 은은한 초록 숲. 빛나는 태양과 우아양으로 따뜻해진 오렌지 해변 *


많은 좋아하는 느낌들을 다 끌어다 붙여도 모자를, 그곳에서의 근사하고 낭만적인 보. 석. 같은 시간들을 기대하알로하 가득한 음악과 영화를 데려와봤다. 욕심을 버리며 3편의 3곡만. 풍부한 상상의 재료들은 일단 마음속에 계속해서 쌓는 것으로. '나만의 훌라, 나만의 하와이'를 꿈꿔본다.


#1. 60년대 일본의 탄광촌, 후쿠시마현 이와키시를 실제 배경으로 한 영화 <훌라걸스 / Hula Girls, 2006>

울며 봤었다. ♬ Hula Girl (Feat. Miho Teruya) '별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에는 눈을 감고 꿈을 꾸면 된다'라고 노래한다. 스토리의 구성이 짐작 가능하다 해도 온갖 역경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꾸던 그 꿈을 꽉 움켜쥐고야 마는 성장 스토리는 안 울래야 안 울 수가 없다. 마지막 부분의 소녀들의 하와이안, 폴리네시군무와 아오이 유우의 솔로 춤 장면은 정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이와키시에는 영화의 모티브가 된 훌라걸스가 공연하는 진짜 ‘스파 리조트 하와이언즈’  있다.


#2. 열대 바다 하면 늘 생각나는 어떤 장면들이 있었다.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꼬마 적에 본 것 같았다.

추후 성인이 되어서 그 영화의 제목을 찾게 되었는데, 이십여 년간 뇌리에 꽂힌 그 바다의 이미지는 뮤지컬 영 <남태평양 / South Pacific,1958>의 노래 장면들이었다. 아마도 집에서 본 것일 텐데 꼬마가 어떻게 그 어영화를 봤지? 기억이 안 난다. 어쩌면 그때부터 나의 Aloha가 시작?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고 껴맞춰 본다.

귀여운 이 음악이 나온다. ♬ Happy Talk  어렴풋이 남아있는 설렘.


#3. 음악을 먼저 알게 된  뮤지컬 영화 <블루 하와이 / Blue Hawaii, 1961>  얼마 전 엘비스 프레슬리의 그린 영화 <엘비스/2022>를 정말 재미있게 보고는 며칠간 그 영화의 ost 만 들었었다. 가수이자 배우였던 레전드, Legend 엘비스 프레슬리 님을 기억하는 의미에서! 그분의 독특한 음색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ELVIS 가 부르는 Blue Hawaii  







< 알로하, 할머니와 손녀> 캔디맘 作. 2022 여름



< 알로하, 할머니와 손녀> by candymom 



2022 여름. 훌라(Hula) 와의 첫 만남 기념!


최 여사 -

재창조하여 그리시고, 없는 색 만들어 채색하시다.



창의적 채색력 ★★★★★








작가의 이전글 낭만적 장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