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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방진 백조 May 18. 2023

ㅅ ㅁ

삭막한 사막. 소망. 생명. 그리고...

거울 속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나지막이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코가 참 이쁘네. 할머니 코가 이쁘지. 내 코가 뭐가 이쁘냐. 에~ 할머니 코가 완전 멋있지. 네 코가 곱상하지”     


할머니와 커피를 마시며 노닥이던 그때,

아련히. 눈에 물기 같은 것이 차오르며 작게 미소가 인다.      


내 얼굴에 할머니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엄마 뱃속에서 계속 똑바른 자세로 다리 아프게 서 있다가 세상 밖으로 꺼내졌을 때, XX 염색체에서 시작된 생명체가 처음 본 사람은 계정웅 산부인과 의사였다. 의사 선생님은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헤어 스타일과 구레나룻 등의 외모로 유명했다는데 더 특이한 것은 부처님 귓불이었다고 한다.

나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만화, 날아라 슈퍼보드의 삼장법사 같은, 크고 길게 늘어진 귀를 보고 엄청 놀랐을 것이다.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눈이 똥그래졌다고 나만의 자작탄생비화를 만들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을 보고 난 더 놀랐을 텐데 그분 덕에 눈이 한 1.5배 정도 더 커졌음에 틀림없다. 바로,      

 

우리 외할머니.      


그래. 분명 그랬을 것이다. 삼장법사 뒤, 아직 마취에서 덜 깬 엄마를 만나기 전에 예쁜 할머니를 먼저 보고 내 눈은 알맞게 더 커진 것이다. 그 후 갓난아기 때부터 10여 년 간, 각자의 직업으로 바빴던 엄마와 아빠 대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나의 엄마와 아빠였다.

아기인 나와 가장 많은 눈 맞춤을 하고, 나를 안고 먹여주셨을 외할머니가 이제는 우리의 아기같이 연약하고 소중한 존재가 된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왔는지 모르는 신비로운 인연, 풀 수 없는 숙제처럼 그렇게. 미지의 우주 속에 영영 남을 것이다.    

  

돌고 돌아 우리는 서로의 아기가 되었다.         



Phase I _ 먹먹함. 7일

  

아기에게처럼 먹여드리고, 씻겨드리고, 울고 웃고 하던 모든 시간의 끝이 왔다.  

할머니께서 결국 요양원으로 가시게 되었다. 가족들 간에 의견 대립은 할머니의 고관절이 부러져 와상 환자가 되어 버리면서 말씀을 거의 못 하시게 된 1년 전부터였다.    

      

- 7.

엄마 시장에서 이것저것 할머니께 만들어 드릴 음식 재료를 구입했다. 그리고 갈비탕을 끓이면서 계속 심란했다. 틀니가 자꾸 내려앉아 할머니가 이제는 잘 드시지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태로 요양원을 어떻게 보내드리지. 엄마의 혼잣말이 내게 다 들렸다.      


- 6.

할머니의 초롱한, 콩장같이 까만 눈을 잘 볼 수 없었다. 지난 이틀간의 수면제 여파인지 좀처럼 깨어나지를 않으신다. 잠시 일어나셨을 때 갈비탕의 고기와 가자미 생선살을 드렸지만 삼키지 못하시고 입에만 물고 계신 것을 엄마가 손으로 끄집어내었다. 생크림 카스텔라를 사 와 함께 먹었던 재작년 여름이 느닷없이 생각났다. ‘부드럽지. 부드럽지.’ 계속 물었던 나와 ‘달다’는 듯한 그 빙그레 표정 말이다. 눈을 감고 누워 계신 할머니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귀에 대고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있는데, 병문안을 온, 동생 제케의 여친, 호순이가 갑자기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주님 말씀하시면  ♪당신을 향한 노래 다 같이 두 곡을 크게 불러드렸다. 할머니는 여전히 눈을 감고 계셨지만, 노래를 듣고 계신 것 같았다.

♬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 주님 나를 이끄소서♪      


할머니와의 모든 순간들이 보석처럼 빛난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 5.

막내 삼촌네 식구가 다녀갔단다. 할머니가 반가우셨겠다. 다행히 컨디션이 괜찮아지셔서 식사를 하셨다고 하니 조금 안도. 조금 편안.       


- 4.

엄마와 막내이모가 할머니의 요양원 짐을 쌌다. 요양원으로 가시는 날, 지금 집도 빼줘야 한단다. 백 년의 옷가지. 짐이 버려졌다. 요양원으로 가게 하시는 것을 극구 말리며 1년을 버텼었다. 짐을 싸는 모습을 보며 누워계신 할머니가 ‘왜에’라고 소리를 내셨고, 무엇인가를 느끼신 것 같은 표정을 보고 두 딸이 할머니를 붙들고 숨죽여 울었다.     


- 3.

할머니 댁에 가서 밥을 먹었다. 가시기 전, 조금이라도 더 할머니 얼굴을 봐둬야 한다.

발을 만져드리고 다리를 주물러드리고 얼굴을 어루만져 드리고 볼과 이마에 뽀뽀를 하고 귀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들도 충분하지 않다. 요양사 언니가 허리를 세워 드리는데 할머니께서 갑자기 큰 소리로 우셨다. 가슴이 미어져 온다. 밤중에 할머니가 할머니의 엄마를 부르며 종종 우셨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다. 몇 해 전, 비 오던 드라이브 길. 엄마가 보고 싶다던 할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마음에 폭우가 쏟아졌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 2.

할머니 댁 근처 카페로 출근했다. 엄마와 이모가 남은 짐을 싸는 동안, 할머니 얼굴을 곱게 만져드리고, 할머니, 할머니를 몇 번 부르고 나와 업무를 하며 이틀 뒤, 할머니가 입소하시는 곳의 요양사 분들께 청하는 편지를 썼다. [선생님들 한 번씩 읽어봐 주세요]라는 글로 할머니, 우리 아기를 맡기며 간곡히 부탁드리는 말을 쓴 것이었다. 이모의 메모에 덧붙여 쓰다 보니 어느새 10번까지 되었다. 손 잡아 드리는 것을 좋아하시니 여유 있으실 때 눈 맞춰 주시고, 손 잡아주시고, 말을 붙여 달라는 말과 할머니의 부러진 고관절 부위를 조심히 다뤄달라는 류의 것들이었다. 할머니 기도문도 따로 적었다.     


- 1.

할머니는 주무시고 계셨다. 조용히 보고 나와 카페에서 회사 일을 했다. 정기승진 인사 공지가 있는 날이었다. 그런 시기였다. 시작되는 달, 희망의 봄. 내년 봄에는 꽃들을 보며 웃을 수 있을까. 흑룡강성 출신이라던 요양사, 옥화언니가 나를 좋아했다. 점심밥을 해놓겠다고 꼭 먹고 가란다. 입맛은 없었지만, 고향에서 잘해 먹었던 것이라며 한가득 퍼놓은 고기 감잣국을 국물까지 맛있게 먹은 후, 중국에 있는 가족 얘기와 친구들과 꽃구경 갈 생각에 들뜬다는 소박한 담소에 호응해 드린 뒤, 그동안 할머니께 잘해줘서 고마웠다고 마음을 전했다.      


0. 그날,

정신이 없었다. 엄마와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내과에서 코로나 검사를 했다. 집에 가자. 집에 가자. 할머니의 작지만 분명한 말소리를 정말 오랜만에 들었다. 할머니 손을 꼭 잡아드렸다. 아기... 이런 아기와 오늘 헤어진다. 막내삼촌과 이모가 도착해 마지막 정리를 했다. 할머니가 1년간 빌려 쓰시던 침대를 일찍 가지러 오는 바람에 할머니께 밥을 드리다 말고 땅바닥에 앉혀서 드시게 했다. 그래도 얼마나 감사한지. 이 밥 먹어야 기운이 난다고 먹여드리니 아기 참새처럼 받아 드셨다. 조금 있자, 할머니를 이송하기 위한 구급차가 왔다.

할머니는 파주 요양원 입소 절차를 받는 내내 눈을 감으신 채 꼼짝 않고 얌전히 누워계셨다.

그곳이 병원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그렇게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헤어졌다. 엘리베이터에 태워져 들어가시는 데 휠체어 뒤에 서 있던 내가 같이 탄다고 생각하셨던 것은 아닐지 막상 타고나서 내가 없어서 놀라셨을 것만 같아 집에 돌아와서도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모두 속으로는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오늘 무사히 그곳에서 혼자 계실 수 있을까. 1년 전 요양원에 가셨던 첫날에 고관절이 부러져 와상 환자가 되신 것이었는데, 이번 요양원에는 밤새 괜찮으실까.      


그날 새벽, 할머니는 응급실로 옮겨지셨다.

숨을 못 쉬셨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망연자실. 엄마와 난, 서로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식탁에 앉아 있었다.

파주 요양원에서는 할머니를 받지 않겠다 했다. 입소는 하루도 안 되어 취소되었다.      


3월의 마지막 밤에서 4월의 첫날을 맞는 새벽 어느 때, 할머니는 까만 공포안에서 사경을 헤매고 계셨던 것이다.    


Phase II _ 응급실에서 세종까지  

   

중환자실에 계시던 3일째 날 아침, 할머니 의식이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할머니와 하느님께 저절로 감사하다는 말이 나왔다. 면회는 불가능하다 했지만 우리 중 누구의 얼굴이라도 보여드려야, 놀란 아기 마음이 진정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다음 날 엄마는, 무작정 병원을 찾아갔고 우여곡절 끝에 콧줄을 끼고 계신 할머니를 만났고, 얼굴을 매만지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나오는 데 성공했다. 간병인께 매일 전화를 걸어 할머니의 상태를 확인하시다가 할머니가 내일 퇴원을 한 후, 바로 세종시로 가게 될 것이란 얘기를 전해 들으셨다. 서울의 요양병원 여러 곳을 알아보던 우리는 어이가 없었다. 다른 가족들이 우리 모르게 정한 일이었다. 왜 아프신 할머니를 굳이 계속 살고 계시던 서울이 아닌, 세종시의 요양원으로 모셔가려 하는지 납득이 안 되었으나, 형제자매 간 문제는 상당히 복잡하게 얽히고설켜있었다. 할머니 얼굴을 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기에. 그다음 날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 엄마, 이모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이번에도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아등바등함 끝에 누워계신 할머니 얼굴을 겨우 잠깐 볼 수 있었다. 파주 요양원에서 헤어졌을 때보다 더 안 좋아지신 듯했고, 말은 한마디도 못 하셨다. 귀에 대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기도문을 빨리 읊어드렸다. 마음이 갈래갈래 불안했다. 병원에서부터 회사까지 1시간이 넘는 거리를 무슨 정신으로 출근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병원에서 남매간에 큰 싸움이 있었다는 것은 후에 들었다.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더 나은 이별의 방법을 찾지 않는 원인 제공자들을 향한 원망은, 바짝 마른 동아줄을 재빠르게 타고 올라가는 불씨가 되어 활활 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소용없는 감정이다.   

   

할머니를 다시 만난 것은 3일 후 세종에서였다. 휠체어를 타고 나오신 할머니는 우리를 못 알아보시는 듯했다. 폐렴이 심하시다. 전날 성당에서 받은 부활절 계란을 만지시게 한 후, 비누 장미꽃을 드렸는데 꽃을 입으로 가져가셨다. 머리가 아득해졌다. 입 안의 혀도 말라있다. 망고 주스 몇 방울로 입 안을 축여드렸더니 아기처럼 입을 오물거리셨다. 20여분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서울로 다시 모셔와야 한다고 강하게 얘기해 보자는 대화가 잠깐 이어졌고, 서울까지의 긴 정체 구간 내내 심란하고 시린 마음만 부여잡고들 있었던 것 같다.

발을 만져드리고 손을 잡아드리고 얼굴을 보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왔으 당분간은 이거면 된다고. 그렇게 다독였다.          


Phase III _ 기도, 나의 할머니      


자기 전, 깨어났을 때,

할머니를 떠올리며 읊조리는 기도는,

늘 같다.     


어제보다 더 평안히 주무시기를.

밝고 따뜻한 아침 햇살이 할머니를 맞아주기를.

아주 조금이라도 하루씩 평화로워지시기를.      


책장 위에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는, 건강한 할머니 사진을 올려놓았다.

안 아픈 할머니. 마음이 편안해진 할머니를 상상한다.

나의 이런 상상은 분명, 할머니의 실제와 연결될 것이다.

보이지는 않으나, 그래서 강력할 마음의 힘, 상상의 힘을 믿고 있다.


*

엊그제 한 달 만에 할머니를 뵈었다. 엄마가 할머니를 붙잡고 엉엉 우는 동안, 막내 이모와 나는 할머니의 왼쪽, 오른쪽 볼을 하나씩 맡고 뽀뽀를 했다. 처음과 달리 다소 뻣뻣해진 요양원 사람들의, 책임 못 진다는 말을 뒤로 하고 요양원 현관 앞, 겨우 50미터쯤 앞에서 할머니께 볕을 쐬어 드렸다. 할머니의 까만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따라왔다. 간절히 바왔던 눈빛. 잠시였지만 기뻤다. 손을 잡고 우리 할머니를 평화로이 지켜달라고 하느님께 부탁드렸다. 인사도 안 했는데 급히 할머니를 모셔가는 간병인을 붙잡아 엘리베이터 앞에서 엄마, 이모와 함께 쫓기듯 할머니의 기도문을 빨리 외워드렸다. 2시간여를 내달려와 30분을 겨우 만난 면회가 끝났다.  

    

서울로 모셔 오려는 엄마의 노력도, 가족 내 불협도 계속 중이다. 어디까지가 최선이고 어떤 것이 좋은 선택이고 어느 때에 내려놓고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해도, 지친다 해도 아름답고 편안하게 할머니와의 작별을 바왔던 원래의 맘, 하나만은 지켜야 한다. 이것이 계속 흘러가 닿는 마음의 결론이었다.  



여러 모습의 할머니가 스쳐 간다.   

   

단연,

꼿꼿하고 품위 있는 모습이다.      


나는 할머니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존경스러웠다.

주어진 삶을 부지런히 적극적으로 살던 분.

강하면서 상냥한,

의연하면서 수줍은,

고상하면서 자존심 충만한. 숙녀.

하얗고 예쁜 미인, 나의 백세 공주.    

   

삭막 사막 위에서 소망을 품고 생명 시간을 보내다.


할머니는, 할머니와의 만남은,

크고 영원한  

내 인생의 선물이다.    



글이라기보다 용기였다.

내게 글을 쓰라고 강요한 사람은 없었지만, 써야 했다.

이 글은, 할머니의 지금을 마주하며 써야 했기에 매우 힘들고 아팠다.      


할머니에 대한 단상들은, 브런치를 시작하기 전부터 메모해 놓고 언젠가는 글로 엮어봐야지 하며 시작도 못하고 간직만 해두고 있었다. 그 사이, 할머니는 걷지 못하게 되셨고, 대화를 못하게 되셨고, 코로 식사를 하시게 되었다. 그때는 그때라서 못 쓰고, 지금은 지금이라서 못 쓰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넘지 않으면 다른 아무런 글도 쓸 수 없었다. 꽉 막힌 채였다.

ㅅ ㅁ 떠오른 제목을 기도문처럼 넉 달이나 품고 선 채로 위로도 아래로도.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이리로도 저리로도. 1미리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글은 안 되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이런 마음으로 있는 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다른 글을. 쓰는 척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용기이다. 아프면서 썼다.    

  

내가 딱 1센티라도 앞으로 나아갔기를 바본다.      



   


♬ Joanne _ 레이디 가가

Where Do You Think You’re Goin’?

백세까지도 또리또리하던 할머니는 고관절이 부러져 누워계시게 된 때부터. 흐려져 가셨다. 고통을 참고 통증을 달래느라 부러진 곳에 손을 갖다 대고 쓰다듬던 모습. 창 밖을 바라보던 쓸쓸한 눈, 천장과 옷장을 가리키며 내게 뭔가를 말씀하시는데 알아듣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답답함에 다다를 때면, 나는 속으로 묻곤 했었다. 할머니는 '지금 어디. 어떤 시간, 어느 곳쯤'에 가 계신 거냐고.  노래 속, ‘어디쯤 가고 있느냐’는 가사는 내가 할머니께 딱 여쭙고 싶은 것이었다. 내가 모시러 가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 바람이 머무는 날 _ 조수미

조수미 님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고운 멜로디와 가사에 눈물이 핑 돌았었다. 언젠가 플루트로 나의 어머니 둘. 할머니와 최여사께 불어드리려고 연습도 했었는데.  

요새는 할머니 생각에 마음이 아파 잘 듣지도 못한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는 연주하면서도 미소 지을 수 있을까?... 있겠지.      

 

♬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2악장 아다지오 

Mozart : Clarinet Concerto In A major, K622 II. Adagio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총애한 독일의 클라리네티스트 자비네 마이어(Sabine Meyer)의 연주   

북아현동 굴다리를 지나 제일 윗 꼭대기 좁은 골목 구석구석까지 할머니를 모시고 로씨와 드라이브를 했던 2년 전 6월의 어느 밤. 아현동에 사시던 기억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어서 모셔갔던 것인데 이 쪽에서 오는 차를 비키고, 저 쪽에서 오는 차에게 양보하며 요리조리 운전하는 내게 "아이고~ 이러다가 세상 끝까지 가겠다" 며 웃으셨다. 나는 할머니의 웃음소리를 듣는 것이 너무 안심되고 행복했다. 


눈을 감고 이 곡을 들으며, 할머니를 모시고 하늘 위를 운전하는 상상을 하고는 한다.

꿈속에서 우린, 어디든 간다. 할머니의 고향, 이북 땅에도 다녀온다.

꿈속에서 난, 할머니가 가고 싶다 하면 어디든 항상 오케이라고 하는 베스트 드라이버다.      




1) 앨범 이름이기도 한 곡, <Joanne>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가가의 본명과 같은 이름의 조앤이라는 고모를 추모하며 부른 노래. 이 앨범은 기존과는 달리 어쿠스틱, 컨트리 장르 등의 서정적이고 잔잔한 멜로디 곡들이 담겨 있어 가가의 커리어에 의미 있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2) 일본 작곡가 오시마 미치루의 Kazabue (카자부에, 風笛 ‘바람피리’라는 뜻)라는 곡에 노랫말을 붙여 조수미 님이 부른 곡. 그때 당시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위해 만들고 부른 이 곡은 <Mother>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3)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흐르던 곡. 목가적이며 은은하고,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이 음악은, 모차르트가 건강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매우 고통스러운 시절에 만든 곡이라고 한다. 이 곡을 만들고 두 달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힘든 상황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곡을 만들 수 있다니. 이 스토리를 알고 난 후, 다시 들었을 때 깊은 울림이 차올랐었다.



♬, ♪ 클릭하시면 뮤직 Play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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