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네오 Sep 30. 2020

늦어도 후회하지 않아

글머리

후회하지 않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ㅋ사 인사팀 출신 루피(가명)님의 강연에서 전수받은 비법을 공개한다.


난 후회에서 빨리 벗어나는 편이다. 후회한다고 과거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길어지는 미련에 발목 잡힐 일을 굳이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그때 이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찾아오는 건 막을 수 없다. 궁금증이 상상의 날개를 펼쳐 현실을 미워하기 전에 끊어내야 한다. 후회를 즐기지 않는 내게도 이따금 찾아오는 후회를 차단할 방법은 필요하다.


루피님이 알려준 <후회하지 않는 방법>*은 간단하다. 너무 단순해서 '겨우 이 정도야?'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효력이 좋아 자주 애용하는 방법이다.

후회라는 건 과거에 더 나은 선택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다. 과거의 순간에 다른 보기를 골랐으면 지금보다 낫겠지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더 나을 것'이라는 가정은 실제로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으므로 내버려 두자. '다른 선택을 못한 점'에 집중하자. 과거의 나는 왜 다른 선택지를 고르지 않았을까? 그건 당시의 선택이 당시의 내 의지, 능력, 상황 등 모든 요건을 고려한 최선의 픽(pick)이었기 때문이다.


내 경우는 의지라는 녀석이 후회를 불러일으키는 주요 원인이다. 이거 먼저 끝내고 쉬어야지 마음을 먹어도 밥만 먹고 나면 몸은 침대 위에 있더라. 그러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땐 후회와 자책이 몰려온다. 한없이 나약한 의지를 탓하게 된다. 그런데 그게 정말 의지의 잘못일까?


쉬고 싶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표출하는 건 전날 내가 늦게 잤거나, 평소에 무조건 반사처럼 침대로 향하는 습관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진작 컨디션 관리를 잘하고, 좋은 습관을 만들어 놨으면 후회할 일도 없었다. 의지는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현재 몸상태와 행동방식에 최적화된 픽을 고르라고 부추겼을 뿐이다. 그렇게 난 의지에 따라 최선의 선택을 내리게 된다.(단, 최선의 선택이 최고의 결과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을 명심하시길.)


결국 과거로 돌아가도 난 같은 선택과 결정을 내린다. 따라서 후회할 필요도 없다.

이게 후회하지 않는 방법의 핵심이다. '타임머신'이 아닌 '평행세계'를 생각하면 쉽다. 현재 상태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이 아니라 과거가 또 한 번 반복되는 '평행세계' 말이다. 과거 그 자체의 정보와 상황에서 선택하는 순간만 찾아오는 것이다. (다수의 창작물에서는 평행세계의 주인공에 특정 변수가 개입해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변수가 없다는 걸 가정한다.)


어차피 같은 선택을 할 거였으니 후회할 일도 없다. 운명론자의 이야기 같지만 약간 다르다. 지나간 과거는 운명으로 받아들이되 미래에 무한한 가능성이 남아 있음을 잊지 않는다. 혹시 미련이 남아 있는 일이 있다면 위의 방법을 적용해보는 걸 추천한다.


*후회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이전의 잘못을 깨치고 뉘우침'이다. 의미 자체로만 해석하면 <미련을 갖지 않는 방법>이 더 정확할 것이다.




누군가와 비교해서 내가 조금 느린 것 같거나 늦게 시작했을 때 선뜻 다음 발걸음을 내딛기가 망설여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해볼 걸'이라는 탄식을 뱉기도 한다. 하지만 난 미련 갖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고, 인생은 속력이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을 믿는다. 태어난 시간은 알아도 떠나갈 시간을 모르는 게 인간이다. 늦었다면 까짓것 운동 열심히 하고 조심성 있게 행동해서 늦은 만큼 오래 살면 되는 거 아닌가?


남들보다 빠르다는 점에 우쭐대던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반대표 계주 주자로 뛰어서 자랑스러웠고, 야구시합에서도 도루만큼은 자신 있었다. 중학생 때까지 시험 전날 벼락치기만으로 좋은 성적을 받았다. 운이 따라서 원하는 대학에 한 번에 합격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순탄한 인생 이야기 같다. 나도 내 앞길이 탄탄대로일 줄 알았다. 그러나 목표 없는 삶은 언젠가 표류하게 돼있다. 졸업을 했지만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의욕 없는 사람을 뽑아줄 직장도 없었다. 내가 멈춰있어도 시곗바늘은 잘 돌아가고, 사회는 묵묵히 하던 일을 한다.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 직장에 자리 잡는 걸 보고 내가 뒤쳐졌다는 걸 알게 됐다.


졸업 후 1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젠 누구도 내게 빠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더 이상 조바심 내지도 신경 쓰지도 않기로 했다. 아무도 날 찾지 않는 정적 속에서 희미한 불꽃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집중하니 이번 생엔 없는 줄 알았던 열정이 보였다. 내가 하는 일을 즐길 수 있는 열정이 있다면 늦게 출발했어도 더 큰 보폭으로 걸을 수 있다. 따라잡지 못해도 괜찮다. 최소한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앞으로가 궁금해지는 삶을 살고 있다.




매거진 '좀 늦으면 어때'는 브런치북을 계획하면서 쓰고 있다. 입시, 군대, 휴학, 졸업, 취업, 꿈 등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서 만났거나 만나게 될 늦음에 관한 이야기로 채울 예정이다. 코로나가 온 세상에 제동을 걸었지만 늦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왔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다.'라는 진부한 표현은 쓰지 않겠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나를 돌아볼 때다.' 마음 깊숙이 감춰뒀던 열정을 발견할 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