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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네오 Oct 07. 2020

학교엔 있어도 인생엔 없는 것

늦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부수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멜로디.

평소라면 뭐였더라 하고 귀를 기울이겠지만 지금은 관심 없다. 누가 좀 꺼줬으면 좋겠다.

그럴수록 소리는 점점 커지고 명확해진다. 페이드인이 들어간 게 분명하다.

30초에서 1분 정도가 지났을까. 반복되는 리듬의 정체를 알 거 같다. 소리의 발원지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몹시 당황스럽다. 어둠 속에서 휴대폰이 화려한 불빛을 내뿜으며 기상나팔을 불고 있다.


눈 감은 지 30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벌써 6시라니 이럴 수 있는 건가. 내 잠은 도대체 누가 잤단 말인가.

억울함에 알람을 끄고 다시 누웠다. 오분만 더 자자.

오분이 십 분이 되고, 십 분이 삼십 분이 될 줄 아무도 몰랐다. 상대성이론이 이럴 때 쓰였던가.

다급한 엄마의 목소리에 번개같이 일어나 허겁지겁 머리를 감고, 밥을 욱여넣고, 아빠 차*에 올라탔다.

(*아빠 찬스는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특권 중 하나였다. 매일 새벽 날 학교까지 태워다 주느라 고생하신 아빠에게 감사하다.)


7시까지 십 분이 남은 상황. 왜 꼭 시간이 촉박할 때면 빨간불은 길어지는 걸까. 신호는 항상 느긋한 자의 편이다.

그래도 아직 희망이 있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수 있다.

부랴부랴 학교 정문을 통과해 실내화 검사를 마쳤다. 그때 울리는 종소리.

허겁지겁 4층 고지에 도달했을 땐 이미 철문은 닫혀 있었다.


지각의 대가는 컸다. 벌점을 받았고, 매를 맞은 손바닥이 벌게졌다. 뒤늦게 열람실에 들어가 앉았지만 공부가 손에 잡힐 리 있나. 마침 우리 반의 지각비는 한 번에 만원. 눈치 빠른 담임이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아침부터 모든 게 꼬였다. 에라 모르겠다. 기분도 꿀꿀한데 노래나 듣자. PMP에 정지된 인강 화면을 띄우고 몰래 MP3를 틀었다.




늦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지각에 관한 최초의 기억도 아닌데 떠오르는 걸 보면 어지간히 스트레스받았던 게 분명하다.


학교는 작은 사회라고도 한다. 정해진 규율 속에서 하면 안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운다. 사회에서 법을 준수해야 하듯, 학교에서는 교칙을 지켜야 한다. 지키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다. 지각은 교칙 중에서도 가장 빈번하게 접하는 항목이다. 매일 아침 체크하고, 체크당한다. 어쩌면 지각 때문에 늦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심어진 게 아닐까?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제한이 필요하다. 무책임한 행동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스스로를 제약하는데 합의했다. 교육기관인 학교를 만들어 제한과 제약에 익숙해지도록 훈련시켜왔다.


학교는 학생의 권리보다는 책임과 의무를 중시한다. 한 명의 교사가 수십 명의 학생을 담당하는 체제에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편중이다. 하지만 '불가피함'을 '당연함'으로 생각한 나머지 선을 넘기도 했다. 두발 단속부터 과도한 복장 검사, 아무렇지 않게 이뤄진 체벌 등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성인이었으면 당하지 않았을 감시와 폭력을 정당화했다.(현재는 학생인권조례의 등장으로 어느 정도 개선되었지만 이조차 아직 시행 중이지 않은 곳이 많다.)


두발, 복장, 체벌과 비교했을 때 '지각'은 비교적 가벼운 사항이다. 정상적인 범위에서의 등교 시간은 마땅히 준수해야 한다. 입학은 정당한 교칙에 따르겠다는 약속 선언이기 때문이다.(학생이 직접 동의하고 약속하는 절차는 없지만 말이다.) 구성원이 기본적인 시간 개념조차 지키지 않는다면 학교는 계획한 교육과정을 결코 마칠 수 없을 것이다. 요즘 같은 온라인 교육이라면 융통성이 커질지 몰라도 오프라인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아쉽게도 항상 정당한 약속만 있는 건 아니다. 약속 뒤에 교묘하게 숨어 마치 진짜인양 우리의 행동을 억압하는 존재가 있다. 그 당시 내게는 '0교시'(아침 자율학습)와 '야자'(야간 자율학습)가 그랬다. 직장인에게는 시간 외 근로, 초과근무, 잔업 등의 형태로 나타나 괴롭힌다. 암묵적인 강요 속에 이뤄지며 불응할 시 페널티를 부과하는 특징이 있다. 정규 학습시간이 아님에도 지각을 체크하고 벌점을 매긴다. 그로 인해 특정 공간에서 퇴출당하거나 체벌을 받기도 한다. 정규 근무시간이 아님에도 참여하지 않으면 살벌한 눈치와 함께 이기주의자로 낙인찍힌다.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이라는 동정심을 유발해 거절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 않은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 친구와의 약속에 늦거나 근무 시간에 늦어도 상관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누군가와 정상적인 약속을 했다면 지키는 게 원칙이다. 약속에 책임질 줄 아는 자세는 필요하다. 그러나 사회는 종종 개인에게 잘못된 약속을 강요하고 책임까지 전가시킨다. 그런 약속에 스스로를 얽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진정으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면 세상의 시선과 주변의 눈치로부터 당당한 게 당연한 거다.




'늦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부수기 위해 조금 먼 길을 돌아왔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누구도 인생에 '정해진 때'를 약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만들어진 '사회의 잘못된 약속'을 지킬 필요도 없다. 난 나에게 그런 약속은 하지 않았다. 내 인생에 지각이 있을 수 없는 이유다. 지각에 관한 강박이 무서운 건 눈 앞의 타이머를 의식하느라 미래의 가능성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인생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혹여 누군가 뒤처진 게 두렵지 않냐고 물어본다면,

뒤처졌기 때문에 나무와 숲을 번갈아 볼 수 있고, 경치를 온전히 담을 수 있다고

천천히 걸어보지 않겠냐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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