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날 지겹도록 따라다녔다. 스토커도 이런 지독한 스토커가 없다. 학생을 매우 좋아하는 특징이 있다. 특히 청소년기, 한 달에 한 번은 잊지 않고 출몰했으니까. 마주칠 때마다 기를 아주 쪽쪽 빨아간다. 그렇게 한창 시달리다 벗어나면 엄청난 해방감을 느낀다. 해방을 행복이라 착각하기도 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아주 악질이면서 무서운 놈이다.
지금은 안 따라다니냐고? 음.. 그건 그렇다. 졸업과 동시에 벗어나긴 한 것 같다. 근데 얘가 안 찾아오니 내가 찾게 되더라. 절대 보고 싶거나 서운해서 그런 건 아니고, 얘를 만나야 할 수 있는 게 많아져서. 사회가 얘를 유독 좋아해서. 싫은데 억지로 친해져야만 하는 불편한 관계.
누가 좀 없애주시면 안 되나요? 시험 없는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시험은 왜 봐야 돼?
학창 시절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질문이다. 소심한 성격 탓에 선생님에겐 입도 뻥끗 못하면서, 집에 와 누나와 부모님에게 분한 마음을 쏟아내곤 했다. 반응은 뻔했다. 무응답으로 일관하기. 간혹 응답자의 컨디션이 좋을 때면 '평가'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 배운걸 '확인'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그럼 다시 피어오르는 질문. 평가는 왜 해? 배운걸 굳이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나? 누굴 위해? 이 정도 나오면 성심껏 대답해준 가족과 싸우자는 거다.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한 나는 혼자서 생각 회로를 돌릴 수밖에. 어차피 결론은 '시험공부하기 싫다.'였지만.
'평가'와 '확인'을 곱씹어 보면 분명 시험에도 이로운 점이 있다. 점수를 매김으로써 현재 내 학습 상태와 이해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배운 걸 복습하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 등. 하지만 그 평가 방법이 맘에 들지 않았고, 굳이 내 지식으로 남기고 싶지 않은데도 수업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복습을 강요하는 태도가 싫었다. 시험이 나를 위해 보는 거라면 남들과 비교당하지 않는 평가를 진행하면서, 내가 지금 관심 있고 배우고 싶은 분야를 선택해 확장해가는 자기 학습 결정권을 보장해주면 어떨까?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머리가 특출 나게 뛰어나 한 번 본 건 잊어버리지 않고, 시험만 봤다 하면 빨간 동그라미로 도배되는 사람이라면 시험이 좋았을 수도 있겠다. 하루 전 벼락치기가 통했던 중학교 때까진 나도 그런대로 견딜만했으니까. 평가 결과가 좋으면 평가 방식도 좋아지는 법이니까. 그러나 요행은 거기까지였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시험'이란 놈은 기고만장해져 시도 때도 없이 등급을 매기려 들었다. 수능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치르는 모의고사,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중간·기말고사, 예고 없이 등장하는 수행평가와 과제까지.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수업과 자습에 시달리다 교문 밖을 나서면 지금 내가 학교에 다니고 있는 건지, 밤 10시가 되면 나가라고 열어주는 우리에 갇혀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수능은 왜 봐야 하는지, 내신을 관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누구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다. 단순히 좋은 대학에 가는 게 이유라면 왜 꼭 대학이어야만 하는가, 대학을 가지 않으면 실패한 학생인 건가라는 의문이 따라왔다. '다른 방법 따윈 없어!닥치고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해. 학생이라면 당연히 커리큘럼에 따라야 하는 거야.'라는 막무가내식 진행에 끌려가기 바빴다.
그렇게 난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중학생 때의 습관이 남아있어 수업도 열심히 듣고, 과제도 하라는 대로 다 했지만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 목표도 동기도 없는데 공부가 손에 잡힐 리 없지. 야자 한 번 쉽게 빼주지 않던 담임을 만나 2년을 고생했다. 엄마와 협의해 일주일에 두 번은 학원 간다는 핑계로 일찍 집으로 향했다. 물론 학원 같은 건 애초에 등록도 안 했다. 집에서 잠만 실컷 잤다.
나중에 대학 가고서 알게 된 얘기지만 전혀 수험생 답지 않은 내 모습에 부모님도 꽤 걱정하셨다. 집에서는 잠만 자고, 일어나 있을 땐 게임이나 하고 있고. 듣고 보니 집에서 책을 펼쳐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잔소리 없이 묵묵히 지켜봐 주신 부모님께 항상 감사하다.
공부가 하기 싫었을 때, 논술을 만났다.
공부도 안 하고 어떻게 대학에 간 거야?라는 질문에 답할 차례인 것 같다. 아직도 가끔 대학 얘기가 나오면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하셨나 봐요.'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운이 좋아서요.'라는 내 대답이 겸손으로 들리겠지만 최소한 나한테는 진심이다. 내가 생각해도 투입한 공부 시간 대비 산출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엄청난 효율성을 만들어 준 비법은 '논술'이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학교에서 외부 강사를 초청해 논술 수업을 열었고, 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강을 신청했다. 과거 국어쌤의 지도하에 참가했던 논술 교실이 생각보다 재밌었기 때문에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책 읽고 토론하기를 좋아하면 해볼 만하겠지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첫 수업이 끝나고 멘붕에 빠졌다. 함께 듣던 친구들도 영혼이 빠져나간 듯했다. 분명 교재에 써진 건 한글인데 읽어도 이해가 안 되고, 선생님이 하는 말은 귀에 닿기도 전에 허공으로 사라졌다. 세상엔 쉬운 게 하나도 없구나. 대학에서 논술 시험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정도 지문을 이해해 답안을 작성할 정도면 당장 대학에 다녀도 손색이 없을 터였다. 근데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내신등급을 높이기 위해 필기 하나 놓치지 않고 따라 적는 학교 수업만 받다가, 대학 교육에 근접한 논술 수업을 들으니 앞선 세상을 미리 훔쳐본 느낌이었다. 호기심에 상자를 몰래 열어본 판도라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야자를 하다 논술 수업을 듣기 위해 빠져 나갈 때면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한 번 들어서는 이해가 안 되니 녹음기를 켰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지금이야 말은 이렇게 하지만 대입 논술 시험을 치르기 직전까지도 내가 과연 합격할 수 있을지에 관한 확신이 전혀 없었다. 첨삭을 받으면 절반 이상을 다시 써야 했고, 잘 쓴다는 칭찬 한 번 받아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원고지에 맞춰 글자를 써 내려갈 때면 열정이 샘솟았고, 친구의 글과 비교해서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내신 시험이나 수능을 앞두고서도 원고지를 놓지 않았다. 어쩌면 논술 자체를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잘하는 것과는 별개로.)
결과론이지만 당시 논술 수업을 신청한 건 고등학생 시절 최고의 선택 중 하나다. 수능을 1년도 안 남기고 만난 논술 덕분에 도저히 나오지 않을 것 같던 '열정'을 경험했다. 다른 수험생과 비교해 조금 늦었지만 이왕 논술을 시작한 거 좋은 대학을 노려보자는 목표가 생겼다. 논술 전형이 아니었다면 지원조차 생각 못해봤을 대학에 원서를 접수했다. 그리고 '운이 좋아' 대학에 붙었고, 무사히 졸업까지 했다.
지나온 발자취를 들여다보면 종종 과거의 내 선택이 우연 아닌 운명임을 발견하게 되는 때가 있다. 당시에는 우연히 논술 수업을 신청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도 모르게 논술 수업의 존재를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얘기다. 난 이전부터 글쓰기와 토론을 좋아했고, 교내 동아리로 신문부를 택했으며, 논술 교실이나 독서 프로그램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논술 수업이 열리기만 한다면 언제든 신청했을 것이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인생의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게 되는 때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시기가 조금 길어지기도 한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목표와 열정을 찾다가 지칠 때면 뒤를 돌아보자.내가 그동안 걸어온 길, 가슴을 설레게 했던 추억 속에서 새로운 빛을 발견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