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작가 90일 차의 고백
브런치를 알게 된 건 5년 전이었다. 카카오라는 듬직한 부모를 두고 세상에 갓 태어난 브런치 베타 버전 시절의 이야기다. 이제는 안 보이면 서운할 것 같은 브런치 수식어 '글이 작품이 되는 공간'이라는 문구에 휘말려 가입까지 하게 됐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마침 독서토론 모임을 시작해서 한창 읽을거리를 찾아다니고 있던 때였다.( <노는데도 기획이 필요할까?>라는 글에 등장했던 그 독서 모임이 맞다.) 그때만 해도 브런치에는 작가가 많지도 않았고, 전업작가는 아니지만 기자나 에디터 등 글과 친숙한 직업을 갖고 계셨던 분들의 글이 메인에 자주 노출됐다. 짜임새 있게 써 내려간 모 기자분의 글을 읽으며 라이킷과 구독을 눌렀고, 성원에 응답하듯 기자님은 작가도 아닌 나를 구독해주셨다.
기분이 묘했다. 기사에 댓글을 남기거나 블로그 이웃이 될 때와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구독이라는 단어가 낯설었지만 그래서 낭만적이었다. '난 당신의 팬입니다. 그대의 모든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됐습니다.'라고 귓가에 속삭이는 느낌이랄까. 구독이 내게 말을 걸어준 날, 작가 신청을 결심했다. 당장 써놓은 글이 없었기에 일주일을 준비해서 간신히 한 편의 글을 완성했고 패기 넘치게 신청 버튼을 클릭했다.
십여 일 정도가 지났을까. 브런치로부터 메일이 왔다. 결과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글이 작품이 되는 공간, 브런치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시원하게 광탈했다. 돌이켜보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당시로서는 몹시 아쉽고 허탈했다. 내 가능성을 믿어 주지 않는 브런치팀이 원망스러웠다. 반항심에 한동안 브런치를 멀리했다. 한 번 관심을 끊으니 정말 잊고 살게 돼버리더라. 나중엔 무려 휴면 계정 전환 메일까지 받았으니. 다시 돌아오고자 마음먹은 건 독서 토론 멤버들과의 모임이 계기가 됐다.(내게 독서 모임과 브런치는 중요한 상관관계로 이어져 있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글을 써서 구독자에게 뉴스레터 형식으로 전달하는 막내의 숨겨진 취미를 알게 된 날이었다.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버킷리스트 맨 윗줄에 써놓았던 '에세이 출간'. 난 그저 리스트만 바라보며 흐뭇해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남들은 바쁜 와중에도 인생에 의미를 더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백수일 때 하지 않는 걸 앞으로 할 수 있을 리 없다.
버킷리스트 달성의 첫걸음으로 브런치는 최적이었다.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때로는 환경이 사람을 만들기도 하니까. 실패를 반복하기 싫어서 브런치가 요구하는 조건을 맞추고자 노력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글 조각과 흔적을 영혼까지 끌어모았다. 첫 신청 때 제출했던 글을 처음부터 고쳐 썼고, 좀 더 에세이스러운 두 편의 글을 새로 추가했다. 책이나 영화 리뷰를 간간이 올리고 있던 블로그 주소까지 첨부해가며 '난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정성이 통했다. 두 번째 시도에 브런치로부터 축하 답신을 받았다. 작가님이라는 황홀한 호칭과 함께.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라는 메일 제목을 읽었을 때 얼마나 뿌듯했던지. ('글이 작품이 되는 공간, 브런치입니다.'라는 제목은 브런치만의 공손한 거절 인사였다는 것도 이때 알았다.)
첫 글을 발행한 지 벌써 3개월이 흘렀다. 그동안 스무 편이 조금 넘는 글을 썼고, 운이 좋아 두 편의 글 <생일을 숨겨보았다>와 <엘리베이터 앞에 선 남자의 한숨>은 브런치 메인에 연달아 오르기도 했다. 몇 천의 조회수를 돌파했다는 알림을 받았을 때의 흥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을 만한 글이 아닌 것 같아서. 열심히 썼지만 부족한 부분도 분명했다. 조회수는 올라가는데 라이킷 수가 정체돼 있으면 혹시 글에 이상한 부분이 있나 자꾸 신경 쓰였다. (언제 브런치 메인에 걸릴지 모르니) 더 좋은 글, 잘 읽히는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뭉게구름 피어나듯 퍼져나갔다.
욕망은 꾸준히 글을 쓰게 하는 동기를 부여해줬지만, 동시에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커지게 했다. 퇴고의 시간을 늘리고 주제도 나름 괜찮게 잡은 것 같은데 왜 메인에 올라가지 못할까. 라이킷과 구독 수는 왜 더 늘어나지 않을까. 분명 브런치를 시작할 때만 해도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하트를 눌러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행복했는데 점점 행복을 느끼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었다. 더 많은 인정과 관심을 필요로 했다.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니 내 글이 자꾸만 작아 보이더라. 여유를 얻고자 발행 횟수를 줄였다. 일주일에 두 번 발행했던 글을 한 번 쓰게 됐고, 정기 발행에서 비정기 발행으로 바꿨다. 일을 하게 돼 이전보다 글 쓸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핑계도 있지만 말 그대로 핑계일 뿐. 하루에 한두 시간 내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단 말인가. '매일 문장을 써서 일주일에 한두 편의 글을 발행한다.'는 소개도 나에게 하는 다짐의 의미로 적었다.
브런치를 내려놓기로 했다. 가만히 놔두면 아무도 보지 않을까 봐 예쁜 접시에 담아 양 손 가득 들고 있던 브런치를 내려놓는다. 관심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행복하게 글을 쓰기 위해. 쉰다는 뜻이 아니다. 들고 있지 않아도 될 욕심을 내려놓는다는 뜻이다. 더 좋은 글, 잘 읽히는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지만 내가 원한다고 하루아침에 세상을 뒤집어 놓을 만한 필력을 손에 넣을 순 없다. 브런치 메인에 걸리고 라이킷과 구독 수가 늘어나는 건 여전히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그게 글을 쓰는 목표는 아니다. 그저 꾸준하게 오래 쓰고, 좋은 글을 오래 읽다 보면 지금보다 성장해 있을 거란 확신이 있다. 글을 쓰고, 퇴고하고, 발행 글 목록을 쭉 내리는 그 순간을 즐길 줄 아는 '행복한 글쟁이'가 되고 싶다.
브런치를 내려놓아 자유로워진 손으로 최대한 다양한 시도를 해보려 한다. 이미 많은 매거진을 벌려놓았지만(그래서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매거진이 많지만) 브런치가 추구하는 컨셉과는 조금 다른 걸 하고 싶어 졌다. 시집. 그것도 N행시집으로. 다음 글은 매거진 <N행시집이네오>로 찾아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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