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질 않아도 그 날짜만 되면 물질적인 보상이 따르는 놀랍고도 신기하면서 마법 같은 날이었다. 부모님에게는 왠지 모르게 신경 쓰이고 지나고 나면 지갑만 가벼워지는 날이었겠지만. 한 번 받으면 돌이킬 수 없으므로 무척 신중히 고민해야 했다. ‘후회 없는 선택을 하자’, 이 원칙만 잘 지키면 선물은 내 미래의 행복까지 책임져줬다.
누구나 그렇듯 매번 성공적이진 않았다. 가격대가 너무 높거나, 전진배치되어 있는 신상품에 혹하거나, 누나의 회유에 넘어가 원하는 선물을 놓치기도 했다. 선물을 통해 기회비용을 깨달았고, 기업의 소비자 현혹 마케팅을 체험했다. ‘헷갈릴 땐 처음 고른 답을 골라야 후회하지 않는다.’(‘틀리지 않는다.’가 아니다.)와 같은 인생의 귀한 지침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어린이날 선물 받기엔 자존심 상하는 나이가 됐고, 산타가 아닌 부모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요구하기엔 철이 들어버렸다. 받는 것보다 드리는 게 자연스러운 어른이 되었다. 형식적으로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건 생일뿐이다. ‘고생은 엄마가 했는데 왜 선물은 너네가 받냐’는 교수님의 효심 돋는 돌직구에 뜨끔하기도 했지만 익숙함이 주는 당연함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직접 주고받는 선물만큼 기쁜 것도 드물지만 시대가 바뀌어감에 따라 ‘언택트 선물’이 대세가 됐다. 코로나로 인해 만남이 귀해지고 있는 요즘이라면 필수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기프티콘과 ‘카카오톡 선물하기’ 서비스가 대박을 치면서 어디서나 메시지로 물건을 교환할 수 있게 되었고, 선결제 후 받는 사람이 주소만 입력하면 집 앞까지 배달해주는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언택트 선물’의 한계가 사라지고 있다.
카카오톡에서는 ‘선물하기’ 서비스 활성화를 위해 생일인 친구를 손수 홍보해주기도 한다. 기록해두고도 깜빡 잊어버리기 쉬운 친구의 생일을 보여주는 고마운 기능이다. 근데 이 기능이 불편할 때가 있다. 분명 축하를 받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과하면 부담으로 다가온다. 받은 건 꼭 갚아줘야 마음이 풀리는 내게 항상 반갑지만은 않은 기능이다. 축하는 받으면 받을수록 좋다고 생각한 작년까지는 카카오에게 생일 홍보를 부탁했지만, 올해는 맡기지 않았다. 생일을 숨겨보았다.
큰 차이가 있었냐고? 작년에 비해 축하 메시지를 조금 덜 받았다. 조금이라는 것에 안심했다. 자기가 불편해서 알림을 띄우지 않아 놓고도 축하받지 못할 걸 걱정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난 모순적인 사람이다. 놀라기도 했다. 카카오톡이 아니고서도 내 생일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난 인복이 많은 사람이다.
오로지 날 위해 자기의 시간을 기꺼이 소비해 준 이들의 메시지를 읽으며 생일의 의미를 생각하게 됐다. 일 년에 단 한 번 우리는 생일 축하에 덧붙여 평소 하지 못했던 응원과 안부를 남긴다. 수줍어서 미처 꺼내놓지 못했을 속마음을 생일이라는 핑계로 전한다. 인생이 시작된 날, 태어난 날에 듣는 말이라면 아무런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서일까.
어릴 땐 손에 쥐고 봐야 안심되는 물질적인 보상이 곧 선물이었다. 축하는 선물에 곁들인 애피타이저에 불과했다. 지금은 진심 어린 축하의 단어와 문장에서 정신적인 보상을 얻는다. 기프티콘은 축하를 화려하게 해 주지만 진심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 선물은 꼭 선물이지 않아도 된다.
손 편지에서 메시지, 포장된 선물상자에서 납작한 기프티콘으로 마음을 전달하는 방식이 바뀌었다. 분명 무게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메시지에 비해 너무 커져버린 기프티콘이 속상하다. ‘이 정도면 알아주겠지’ 보단 ‘이 정도야!’라고 말해주는 진심이 듣고 싶다.
이토록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날 위해, 꼭꼭 숨겨둔 내 생일을 잊지 않고 축하해 준 가족과 친구, 친척들에게 고맙다.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그들이 있어 희망을 잃지 않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