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의 흰옷」을 읽고
구엔 치 홍은 월남 시골 마을 비엔 포아 출신의 당찬 여학생이다. 식민지기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던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녀는 어머니를 도와 시장에서 고기를 팔며 힘겹게 자란다. 매일 시장과 학교를 오가는 중노동. 그런 와중에도 우수한 성적으로 사이공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홍의 꿈은 오직 하나다. 간호원이 돼 가족과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 고향을 떠난 홍은 “가족을 실망시키지 말라”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공부에만 전념한다. 사이공 시내의 찻집도, 극장도, 영화관도 그녀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언제나 긴 머리를 뒤로 단정히 묶고, 흰 아오자이를 깨끗이 빨아 입을 뿐이다.
하지만 홍의 평범한 생활은 오래가지 못 한다. 급장인 호앙과 수학반원 홍 랑, 개학날 같은 자리에 앉아 친해진 BB타잉과 만나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 뜬 것이다. 연극에서 월남 여성 영웅 보오 티 싸우를 연기해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은 그녀는, 오빠와 어머니를 여의고 어렵게 사는 타잉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들으며 고민한다. 과연 나 혼자 열심히 공부하고 절제 있는 생활을 하는 게 최선인가?
홍은 게릴라 대원으로 대불 저항 전쟁에 나섰던 아버지와 그런 남편을 위해 삼엄한 경계를 뚫고 식사를 나른 어머니, 역시 항전에 나선 사촌 하이 오빠를 떠올린다. 그리고 친구들과 매일 베트남 현실을 토론하며 깨닫는다.
“나는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 게 되었고, 나의 모든 체험들과 성장해 온 배경, 가족들의 일이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서 파악될 성질의 것들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사회 현실 속에서라야만이 정당한 의미로 파악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62쪽)
홍은 식민 지배에 신음하는 베트남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간호원의 꿈도 포기하고,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친구들과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은밀하게 각종 투쟁을 주도한 그녀는 조직을 위해 두 번이나 유급하며 결의를 다진다. 해방운동 세력의 아지트인 항전구에서 기초훈련도 받는다.
어느새 운동권 핵심 인물로 성장한 호앙의 사랑 고백도 대의를 생각해 거절할 정도로 투쟁에 몰두한 홍. 하지만 활동이 발각돼 결국 경찰에 체포된다. 열악한 환경과 시도 때도 없는 모진 고문. 처참하기 이를 때 없는 수감 생활 속에서 홍은 여러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오히려 더 성숙한 운동가로 거듭난다.
한 다발의 비라 몇 장의 신문이
감쪽같이 감춰진 가방을 껴안고
행운의 빛을 전하는
작은 파랑새처럼
나는 깊은 잠에 빠진 사이공 거리
여기저기를 날아 다닌다
복습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평온한 밤도 아직 오지 않았다
내일도 수업시간엔 눈거풀이 무겁겠지
그러나 나는 간다 내일도 또 내일도
그리고 어느날 내 모습은
거리에서 사라졌다
어머니의 슬픔과 친구들의 피눈물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 에이는 회상을 뒤로 한 채
하지만 나는 슬퍼하지 않는다
사랑과 신뢰로 이어진 우리들의 삶
조국에게 동지에게 연인에게
굳게 맺은 나의 언약은 생명이 있는 한
변함이 없다
죽음을 넘어 뇌옥의 쇠사슬을 끊고
암흑의 벽에
떨리는 손으로 쓴다 흰 옷의 시를
방울방울 흐르는 선혈 속에 뚜렷이
이 흰 옷 더욱 희게 언제까지나…
흰 옷 – 레 아인 수앙 中
「사이공의 흰옷」은 1960년대 초 베트남 학생운동을 다룬 소설이다. 대불 저항 전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민중 작가 구엔 반 봉이 훗날 호치민시 제10지구 행정위원장을 맡게 되는 구엔 치 차우를 모델로 쓴 것이다. 소설은 조국에 대한 헌신과 희생을 중점으로 다룬다.
제목의‘흰옷’은 주인공을 비롯해 베트남 여학생이 즐겨 입는 흰 아오자이로, 순결하고 결연한 투쟁 의지를 뜻한다. 혹독한 고문을 받는 가운데서도 아오자이만큼은 더럽혀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홍의 모습을 보면 그 상징성을 알 수 있다. 이런 까닭에 1970·80년대 한국 대학 운동권에서 신입생들의 투쟁 윤리와 감성을 기르는 교재로 「사이공의 흰옷」을 활용했다고 한다.
학생 운동이 붕괴하고, 베트남 현실도 많이 바뀐 지금, <사이공의 흰옷>이 솔직히 마음속에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 한다. 그저 예전에는 운동권이 이런 책을 읽었구나, 하는 정도일 뿐.
기저에 깔린 정서도 그다지 맘에 들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사이공의 흰옷」에서 여성 운동권의 동지애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대의를 위해선 개인의 순결(특히 여성)이 중요하다는 걸 지나치게 강조하고, 운동에 나서지 않고 침묵하는 사람을 낮잡아 보는 시선은 불편한 게 사실이다. 뭐, 당대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겠지만 말이다. 그냥 학교 도서관 지하에 처박혀있던 과거 운동권의 필독서를 읽은 것으로 만족하겠다. (15/08/16)
「사이공의 흰옷」
구엔 반 봉 / 친구 /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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