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보고
인연이라는 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하필 이때, 하필 이곳에서, 하필 이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평생 모르고 지냈을 주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때 그 순간, 조금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영영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 하고 살았을 텐데. 생각이 거기에 미치면 어쩐지 아찔하다. 이 사람과 알고 지내게 된 건 내 선택의 결과일까, 아니면 그저 순전한 우연일까.
결국 상황이 인연을 만드는 거 같다. 여느 때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사람과 가까워지는 건 시기와 여건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덕분이다. 함께 입학한 동기로, 함께 일하는 동료로, 함께 활동하는 동아리원으로, 필연인지 우연인지 만나 인연을 쌓는 것이다. 온전히 선택의 결과라 할 수도, 그렇다고 우연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복잡 미묘한 맥락 속에서 우리는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소피아 코폴라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해리스와 샬롯은 LA나 뉴욕이었다면 그냥 모르고 지나쳤을 사이다. 미국에서는 둘 사이에 유대를 느낄 요소가 거의 없으니 말이다. 해리스가 샬롯과 친해진 뒤, 샬롯에게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봤던 것 기억 안 나냐고 묻자, 샬롯은 잘 모르겠다며 해리스가 “평범한 얼굴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 정도로 눈여겨보지 않을 만큼 처음 둘은 범상히 스쳐 지나갈 운명이었다.
하지만 호텔 바에서 어쩐지 소외감을 느끼는 듯한 인상의 해리스를 보며, 역시 혼자 술을 마시던 샬롯은 모종의 유대를 느끼고 비로소 해리스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둘은 함께 술을 마시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금세 가까워진다. 불확실한 진로와 결혼 생활로 방황하는 샬롯에게 해리스는 제 경험을 얘기하며 격려하고, 낯선 곳에 적응 못 하고 답답함을 느끼던 해리스와 처지가 비슷한 샬롯은 해리스에게 이곳저곳 놀러 가자고 제안한다.
영화에서 둘 사이에 어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진 않는다. 즉, 별다른 서사가 없다. 예사롭기 이를 데 없는 일상적 대화와 이곳저곳을 함께 여행하며 벌어지는 소소한 일화가 러닝타임 과반을 차지할 뿐이다. 해리스와 샬롯이 사랑도, 그렇다고 우정도 아닐 관계를 맺는 과정을 예민한 감정선을 따라 그리고 있다. 도쿄라는 낯선 곳에 불시착한 이방인들 간의 짧은 만남, 그 자체가 이 영화의 주제인 모양이다.
따라서 둘의 관계의 유효기간도 분명할 수밖에 없다. 영화 말미 제법 애틋하게 헤어지지만, 미국에서 해리스와 샬롯이 다시 만난다면 일본에서 만큼 긴밀함은 못 느끼지 않을까 싶다. 각자 배우자와 소통 문제를 겪는 와중에, 도쿄라는 외지를 방황하며 평소보다 더 소외감을 느낀다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성립 가능했던 관계니 말이다. 둘이 굳이 다음 만남을 기약하지 않는 것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 아닐까?
인간관계의 권태가 어느 순간 찾아오는 것도, 결국 이 인연을 만든 특정한 시기와 여건이 소멸한 탓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하필 그때, 하필 그곳에서, 하필 그 짓을 한 덕에 알게 된 사람과 더러 멀어질 수밖에 없는 건 그 때문이리라. 시기와 여건이 변하는 걸 어찌 막을 수 있을까. 그래서 언젠가부터 관계라는 것이 내 통제 밖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걸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 하는 경우가 많아 사달이 나는 거 같다. 어려운 문제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Lost In Translation)]
소피아 코폴라 / 미국 /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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