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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만 Nov 05. 2023

제 남편은 말싸개입니다 2

포스트잇에 영어 단어를 적는 기분으로,  남편의 대화방식을 적었다. 적고 나니까 내가 진짜 원하는  알았으며, 절대 이뤄지지 않는 건 무엇인지도 인지했다. 그럼 이제 뭐부터 해야 하지?


일단 남편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니까 내가 답답하다는 표현을 이제는 좀 다르게 하고 싶다. 19년 동안 영화의 클리셰처럼 예상가능한 패턴으로 전했으니까 이젠 좀 다르게. 조금이라도 가볍게! (평생?을 장녀가 가진 진지함과 책임감으로 무겁게만 살아와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제보다 0.0001g이라도 가벼우면 되니까!)


내 마음을 표현하되 유쾌하게 받아들일 만한 뭔가 없을까. 남편도 기분 안 나쁘고 나도 가벼워지는. 오늘도 말을 여기저기 싸놓으며 거실과 베란다를 왔다 갔다 하고 있는 남편을 보면서 고민했다. 

'어제오늘 좀 덜 춥더라 그치?'라는 내 말에 맞다라며 동의하거나, 그래서 낮엔 겉옷을 벗고 있었다는 평범한 말은 역시나 없다. 갑자기 기후 변화에 대한 강의가 시작됐다. '그건 말이지~~~ ' 기후변화 강의가 벌써 10분을 넘어섰다.


나: 나 이젠 별로 안 듣고 싶어.

남편: 그래 넌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난 말할 자유가 있어.


남편은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슬슬 짜증이 났다. 짜증이 날 수는 있지만 짜증을 내는 건 선택할 수 있다. 이젠 다른 방식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우선 짜증을 좀 무시하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좀 더 가볍게 전할 말을 만들어 봤다. 말을 저렇게 싸고 치우지 않는 사람... 이니까 음, 말. 싸. 개!



나: 자기야, 당신은 <말싸개>야.

남편: 뭐? 왜? 말싸개? 그게 뭐야?


오줌을 아무 곳에나 싸면 뭐라고 하지? 오줌싸개. 똥을 아무 곳에나 싸는 강아지를 보면 어이구~ 저 똥싸개! 그러지. 당신도 아무 말이나 하고 있으니까 말싸개지! 난 기후변화 강의를 듣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계속했어. 벌써 16분 동안이나..


그리고 당신이 다림질을 왜 잘하는지 난 궁금하지 않거든. 그걸 11분째 설명하고 있고. 다림질하는 법을 알려달라 한 적도 없는데 당신은 나를 가르치고 있지. 30동안 내가 듣기 싫은 지 아닌지 살피지도 않고, 당신이 하고 싶은 말만 싸고 있거든. 휴지 줘? 빨간 휴지 줄까?


남편이 웃었다. 이해해서 웃는 건지 빨간 휴지라는 말에 웃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웃었다. 그것도 1분 동안이나 숨 넘어갈 정도로.




말싸개가 성립되려면 3가지를 충족해야 한다.

1. 상대가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

"이건 말이지~ "

"그거 내가 해봤는데"

"그게 아니고~  "


2. 해버린 말을 본인이 책임지지 못할 때

"방금 그 말은 선을 넘은 것 같은데?"

"에이, 농담인 걸 가지고 속 좁게 왜 그래? "


3. 상대방이 한 말은 그저 '소리'로만 취급하는 사람

"듣고 있어?"

"어 들려~ "




아무 때나 오줌 싸는 갓난아기는 오줌싸개, 아무 데나 똥 싸는 1개월 된 강아지는 똥싸개. 이 둘은 귀엽기나 하지. 말싸개 사람은 상대를 캔디로 만든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 소통이 안 되는 사람과 사는 사람은 슬프거나 아프거나 외로워진다. 특히 말싸개의 나이가 많을수록 상대를 외롭게 만드는 능력은 강력하다.

 

이런 사람이라서 연을 끊거나 무시하며 살기엔 내 인생이 너무 서글프다. 상대방이 바뀌길 바라는 사람이 상처받고 더 쪼그라든다. 그렇게 나를 방치하긴 싫다. 그렇다면 이왕 사는 거 '견디는 것'보다 나아야 한다.


나이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게 2가지가 있다. 인정과 감사다.

'남편은 나에게 질문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 적이 없었다. 부정만 했지. 제발 다른 사람이 되어 달라고. 나에게 질문도 하고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달라고만 했다.


오늘은 인정과 부정 사이 그 어디쯤에서 헤매다가 희미한 빛을 본 느낌이었다. 인정하면 다음이 보인다. 부정하면 다운만 되고.


다육이는 몇 년에 한 번 꽃이 필까 말까 하는 식물이라는 걸 인정해야 참을성 있게 키울 수 있듯이, 남편은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받아들이고 나니 감사할 것도 보였다.

비록 듣기는 싫어도 귀가 있으니까 '기후변화 강의 같은 말'이라도 들을 수 있고, 남편은 '말'자체를 할 수 있다는 그 온전함에 감사하며 살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꿀꺽! 이 먹은 마음이 언제 또 도망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은 먹고 본다. 다음번엔 진짜 휴지를 건네봐야지. 쿠팡에 빨간 휴지가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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