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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만 Dec 10. 2023

출근해야 하는데 차가 없다

출근해야 하는데 차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남편에게 전화했다.


나: 남편, 차가 없어

남편: 어.. 억!


어찌 된 건지 기억을 더듬는 듯했고, 2초 뒤 알게 된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곧 이어지는 남편의 설명은 이랬다. 


어제 남편이 출근할 때 차를 회사에 가져갔고, 퇴근할 땐 그냥 걸어왔단다. 즉, 회사에 차를 놓고 집에 왔다는 얘기. 남편 회사는 걸어서 20분 정도 되는 거리라 가까운 편이다. 어젠 차를 가져가야 할 일이 있어서 가져갔고 평소 습관대로 퇴근할 때 걸어온 거다. 남편은 늘 하던 대로 아무 생각 없이 걸어왔다고. 


난 무슨 '촉'이었는지 아침에 눈뜨자마자 차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오늘은 내가 차를 써야 하는 날이었지만 이렇게 차가 있는지 미리 확인해 본 건 처음이었다. 


'그러면 지금 빨리 회사 가서 차를 가져오는 게 어떻겠냐' 는 내 말에 남편은 약간 귀찮지만 미안하기도 한 마음으로 뜸들이는 듯했다. 지금 말고 쫌만 있다가, 출근시간 30분 전에 일찍 나가서 자기랑 같이 회사에 택시를 타고 간 후, 거기서 차를 가져가라는 얘기다. 뭐 그래도 되지만, 택시가 안 잡힐 확률은 고려하지 않은 눈치였다. 일단 받아들이고 서로 출근 준비하며 아이들 아침 차려주고 집을 나섰다. 


평소보다 35분 일찍 나왔고 택시를 불렀지만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카카오택시 화면을 새로고침 해봤지만 대기시간만 30분이 넘었다. 택시 승강장에 뛰어가듯 가보니 빈 택시는 없었다. 아무 택시나 붙잡고 같이 타자고 말이라도 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편은 걸어가는 게 빠르겠다며 일단 회사까지 걷잰다. 음~ 별다른 대안이 없으니 남편 회사로 같이 걷기 시작했다.


남편은 마음이 급했는지 발걸음이 빨라졌고, 시선은 바닥에 두었다. 꼭 동전이라도 찾는 사람처럼. 그 자세로 빠르게 걷는 모습이 확대돼서 보이는 듯했다. 영화 볼 때 주인공의 모습이 화면에 꽉 차는 느낌이랄까. 지금 저 사람은 꽤 미안해하고 있고,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게 보였다.


평소완 다르게 빠르게 걷는 남편의 발걸음을 따라가기 힘들어 약간 뒤처져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남편은 말을 꺼냈다. 자기가 먼저 가서 차를 가져올 테니 회사까지 오지 말고, 할리스 카페 근처까지만 와서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게 어떻겠냐고. 나도 그러자 했다. 남편 걸음에 맞춰 뛸 정도의 에너지를 쓰면 난 오전에 일할 기력을 다 쓸 것 같았고, 그거 말곤 더 좋은 대안이 없었다. 


남편은 내 눈치를 살피고 허락 같은 결정을 기다리며 초조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산책 나가길 기다리는 강아지 눈빛까진 아니었어도 약간은 귀여웠다. 이런 상황에서 귀엽다니. 순간 그런 나도 어이없었지만 여하튼 빠른 결정을 내려줬다. 


나: 어~ 알았어, 빨리 뛰어!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남편은 경보 선수처럼 마구 걸었다. 그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응원을 담아 소리쳤다. '뛰어, 뛰라고!' 남편의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며 예전 생각이 났다. 


전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간혹 있었다. 자주 깜박하고 아무 생각 없이 습관대로 행동하는 남편이라서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 하지만 내 마음이 달라져 있다는 걸 느꼈다.


나에겐 오늘 같은 이 정도의 일은, 2주 동안 남편에게 잔소리할 정도의 심각한 '문제 있음'이었다. 차가 있어야 출근할 수 있는 나의 상황을 무시하는 거고, 나를 배려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며 나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화를 내고도 남을 일이었다. 아마 악을 쓰며 무시받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눈이 뒤집히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했고.


그저 본인의 습관대로 움직였을 뿐, 나를 배려하지 않았다거나 존중을 안 해서가 아니라는 걸 몰랐다. 그래서 항상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난 짜증과 화를 내뱉었고, 남편은 기분 나빠하며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했었다. 그 아니라는 말마저 받아들이지도 못했지. 아닌 게 아닌 것 같았으니까. 


습관대로 움직이는 남편의 행동을 보며, 나를 무시하고 배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 감정 패턴은, 내 뇌에서 지워진 모양이다. 평상 시에 균형운동을 꾸준히 해놓으면 넘어질 뻔할 때 바로 균형을 잡을 수 있듯이, 그동안 빼기명상을 해온 시간이 차곡차곡 쌓였나보다. 그 덕에 지옥같을 뻔했던 아침이 상당히 평화로웠다. 뇌에 새로운 길이 만들어진 듯했다. 신기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어금니를 악 물고, 눈 흘기고 짜증 내는 패턴이 사라지니 다른 것들이 보였다. 



1. 뭐가 중요한 지 우선순위가 알아차려졌다. 

존중이나 배려, 이딴 거보다는 현재 차를 빨리 가져와야 하는 상황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집중하게 됐다. '나를 얼마나 무시하면 저러나' 또는 '왜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사는지 한심하다'는 잡생각이 안 나니까 자연스럽게 현재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였다



2. 남편이 미안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남편에게 이런 일이 생기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못 들었지만, 미안해하는 마음을 빠른 걸음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 두 가지면 충분하다는 생각과 빨리 걸을 수 있는 남편의 다리 건강이 새삼 고맙게까지 느껴졌다. 비록 키에 비해 짧은 다리지만 저렇게까지 빨리 걸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놀라웠다. 


어느새 나도 열심히 걸어 남편 회사 근처에 있는 카페에 도착했고, 아직 남편은 오지 않았다. 나란 인간이 이런 상황에서 짜증 한번 안 내고, 고마움까지 느낀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휴대폰 메모장에 적으며 되새김질했다. 



메모장에 남긴 내용은, 

남편은 나를 배려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습관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본인도 정신 없이 차를 회사에 놓고 아무 생각 없이 집에 왔을 뿐이라는 것. 

아침에 택시를 못 잡을 수도 있지만 그것까지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건, 뭐 그리 크게 잘못한 게 아니라는 것.

미안하단 말은, 뛰어가다시피 빠르게 걸어간 그 사람의 행동에 이미 묻어나 있다는 것. 

그렇게 걸을 수 있을 만큼 건강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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