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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ntimental Vagabond Feb 13. 2022

시작하다


시작하다 :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 단계를 이루거나 그렇게 하게 하다.


새해가 시작되는 1월보다 봄이 되어야 비로소 새롭게 또 한 해가 시작된다고 느낀다. 달은 1월, 2월, 3월 순서로 세지만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세어서 일까. 인간이 인위적으로 지정한(현재의 달력 체계는 기원전 46년에 로마 황제 카이사르 의해 그레고리력이 시작되었다) 달력의 날짜보다는 자연이 말하는 시간이 내 몸과 마음에 더 와닿기 때문인 듯도 하다.


봄이 되면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될 때가 있었다. 새 학년, 새 교과서, 새로운 반 친구들. 새 교과서에 반듯하게 커버를 씌우고, 노트에 또박또박 이름을 쓰고, 연필을 가지런히 깎아 필통에 채우고, 새하얀 실내화를 한 켤레 마련하고, 의식을 지내듯 매봄 새로운 시작을 준비했다.


그러나 졸업을 하고 더 이상 학생 신분이 아니게 되고 나니, 가만히 있어도 매년 새롭게 시작이 찾아오지 않고 시작조차도 내가 스스로 찾아 시작해야 되었다. 학교 시스템의 큰 장점 중 하나는 매해 새롭게 리셋하여 시작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학교를 졸업하고도 일, 관계, 취미 등등 크고 작은 새로운 시작들은 있었다. 새로운 일의 시작, 새로운 연애의 시작, 결혼생활의 시작, 요가의 시작 등등. 그러나 삶은 지속되고, 매번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할 수는 없게 되는 시점이 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새롭게 시작하는 빈도가 줄어들며 자연스레 내 몸에 새겨진 시작의 설렘이라는 근육은 조금씩 줄어들고, 두려움이라는 지방이 조금씩 더 쌓이고 있는 것 같다.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한 지 두 달 여가 지났지만, 여전히 몸과 마음이 새롭게 시작한 한 해에 맞춰 리셋이 되지 않았을 때쯤 입춘맞이 요가 수업을 다녀왔다. 수업에서 선생님이 입춘을 맞이하는 우리 조상님들의 지혜로운 풍속 얘기를 해주셨는데, 계절을 따라 때를 알고 산 조상들의 지혜에서 한 해의 시작, 새로운 계절의 시작을 어떤 마음과 자세로 해야 할지 힌트를 얻게 되었다.


우리 조상님들은 입춘 시기가 오면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이라 하여 아무도 모르게 좋은 일을 해놓는다. 아무도 모르게 쓰레기를 치운다든지, 흔들리는 돌다리가 있으면 몰래 돌다리 아래 돌을 괴어놓는다는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봄을 적선공덕행으로 시작하면 내가 쌓은 공덕이 다시 나에게 덕으로 돌아온다 믿었단다.


또 하나 ‘아홉 차리’ 풍속이 있는데 입춘 시기에는 무엇을 하든 아홉 번을 하는 것이다. 글도 아홉 번을 읽고, 새끼를 꼬아도 아홉 번을 꼬고, 밥을 먹어도 아홉 번을 먹는 등 열 번을 채우지 않는다. 10은 동양에서 완전수이기 때문에 오히려 약간 모자란 듯 일을 남겨 놓고 이후에도 계속 일을 이어갈 수 있도록 기운을 북돋는 것이 이 풍속의 숨은 뜻이라고 한다. 처음부터 지치지 않고 약간 모자란 듯이 워밍업을 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한 해의 농사와 풍년을 기원하며 입춘쯤에는 올 가을 무엇을 수확할 것인지 가닥을 잡고,  그 출발점을 적선공덕행과 아홉 차리로 삼았던 것이다. 인생이라는 농사도 결국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입춘 요가가 끝나고 올 한 해 내가 수확하고 싶은 것들을 써본 뒤 적선공덕행 거리들을 찾기 시작했다. 동네 길에 떨어진 쓰레기가 없는지, 누굴 도와줄 방법이 없는지. 나에게 다시 덕이 되어오리라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출발했지만 적선공덕행을 행한 뒤의 그 뿌듯함은 되려 한해를 힘차게 살아갈 동력이 되어 돌아온다. 


그리고 매일 아침 아홉차리로 요가의 수리야나마스카라 세트를 아홉 세트씩 하고 있다. 크게 힘들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은 수리야나마스카라 아홉 세트를 하고 시르사아사나(머리서기)를 90초 정도 하고 나면 찌뿌둥한 아침을 매일 상쾌하게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입춘대길(立春大吉). 입춘의 입이 봄에 들어선다는 ‘들 입(入)’이 아닌  ‘봄을 세우다’(立)는 글자가 이제야 보인다. 태양이 지고 뜨고 또 새롭게 하루가 시작되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또 새롭게 계절이 시작된다. 그러나 나의 하루도, 봄도 스스로 세우고 내가 고른 씨앗의 싹을 잘 움트이게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시작의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어떤 일을, 어떤 관계를 새롭게 시작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자연의 흐름에 맞춰 하루하루의 시작, 새 계절의 시작을 스스로 잘 세우는 연습을 하며 근육을 키워가다 보면 결국 내 뜻으로 시작하게 될 무언가도 두려움 없이 새롭게 잘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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