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에 점령당한 여인, 글쓰기에 몰두한 여인
『한 여자』를 읽은 후, 아니 에르노의 작품세계를 알고 싶어 그의 대표작들을 읽는 중이다.
『사진의 용도』는 좋았고, 『사건』은 흐름을 따라 읽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탐닉』은 불편했고, 『집착』은 여전히 불편했지만 비로소 그녀의 글쓰기를 조금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을 열어주었다. 이 글이 다른 문학작품들 사이에 끼면 독자들이 혼란스러울 것 같아,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이어간다.
탁자 위에 쌓였던 원고들이 바람에 흩날린다. 종이 위에는 한 여인의 고뇌가, 지워지지 않는 상실이, 질투로 점령당한 시간이 적혀 있다. 아니 에르노의 『집착(몰두, L’Occupation)』은 바로 그런 책이다.
에르노는 18년간의 결혼생활을 끝낸 뒤, W라는 남자를 만나 6년간 사랑했다.
그러나 그 관계도 결국 파국을 맞았다. 떠났지만, 완전히 떠나지 못했다. 간혹 전화가 오기도 했고, 다시 만나기도 했다. 닫히지 않은 문, 끊어내지 못한 줄 하나가 그녀를 끝내 붙잡았다. 그 틈으로 스며든 것은 W의 곁에 있는 또 다른 여인의 그림자였다.
에르노는 그 여인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알 수 없기에 더 선명했다. 얼굴과 몸짓, 말투와 습관까지 끝없이 상상하며 그녀의 하루는 점령당했다. 질투는 실제보다 더 강력한 환영이 되어, 삶 전체를 몰두와 불안 속에 가두었다.
책의 첫 문장은 그 글쓰기의 태도를 단번에 드러낸다.
“나는 내가 쓴 글이 출간될 쯤이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했다. 나는 죽고, 더 이상 심판할 사람이 없기라도 할 것처럼.”
죽음을 전제한 글쓰기. 더 이상 가식도, 체면도, 두려움도 없다. 살아 있는 동안 늘 따라다니는 사람들의 시선과 도덕적 심판에서 벗어나, 오직 자기 자신 앞에만 선 글쓰기다. 그렇기에 에르노는 가장 부끄럽고 은밀한 내면까지 기록할 수 있었다.
그의 방식은 사실주의다. 허구적 장치나 낭만적 미화는 없다. 감정의 나열조차 건조하다. 그러나 그 차가움이 오히려 진실을 드러낸다. 질투와 상실, 끝내지 못한 관계가 인간의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한 개인의 기록이 사회적 증언이 된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불편한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왜 완전히 떠나지 못한 관계가 더 깊은 고통을 낳는가?
닫지 못한 문은 늘 바람을 불러들이고, 남겨둔 작은 틈은 끝내 삶을 잠식한다.
신앙의 삶에서도 비슷하다.
우리는 죄와 결별했다고 말하면서도, 어떤 끈 하나는 여전히 남겨둔다. 습관처럼, 위안처럼, 혹은 언젠가 돌아갈 피난처처럼 붙잡아 둔다. 그러나 바로 그 미완의 결별이 영혼을 더 깊은 갈등과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 (마태복음 6:34)
오늘의 결단, 오늘의 고백이 중요하다.
닫히지 않은 문은 내일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고통을 낳는다. 지금 끊어내지 못하면, 그 끈은 우리를 더 세차게 붙잡는다.
『집착』은 질투에 점령당한 한 여인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전제했기에 가장 정직한 고백이 가능했던 글쓰기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에도 울림을 준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나는 어떤 고백을 남길까? 무엇과 단호히 결별하고, 무엇에 몰두하며 하나님 앞에 설까?
원고지 위에 흩날리는 글자들처럼, 우리의 삶은 늘 흔들리고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은총 안에서만 진실한 자유가 가능하다. 에르노가 글쓰기에 몰두함으로써 자신을 직면했듯, 신앙인은 오늘의 결단 속에서 하나님 앞에 정직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