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어떻게 해야 한국이 용서해 줄까요?”
클라이언트였던 한 일본인의 질문이 순간 나를 멍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일본 출장 하루 전, 관례처럼 동행하는 이의 SNS 프로필을 살폈다.
거기에는 대동아공영권 지도—일본 제국주의 시절의 영토 구상이 담긴 이미지가 올려져 있었다. 그 안에는 한국과 중국 일부가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나는 다음 날 예정된 업무 일정에 앞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당황스러움을 삼켜야 했다.
그는 일본의 정치학교를 수료한 사람이었다. 한국 오피스에서 근무하기 전에는 수년간 중국에서도 머물렀고, 한국어 역시 유창했다.
“이미 일본 정부가 사과했고, 한국 정부도 그걸 받아들였잖아요. 그런데 한국은 도대체 얼마나 더 사과를 원하나요?”
연속적으로 이어지던 그의 질문들에, 나는 당시 감정적인 답밖에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전쟁 중인 대한민국의 상황을 통해 당시의 대화를 복기해 보면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어쩌면 그는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의 관계의 의미와 변화에 대해 더 많은 맥락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20년 넘는 글로벌 기업에서의 커리어를 쌓아온 그가 정치를 향해 나아갈 가능성까지 떠올리면, 그가 한국과 중국, 일본 세 나라에서 관찰하고 겪은 변화 즉, 대중의 성향부터 시장의 흐름, 일상의 디테일까지 얼마나 깊이 체화하고 있을지, 그리고 그 모든 경험을 어떻게 ‘자국 중심’ 미래 설계로 녹여낼지를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섬뜩하고 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가 한국인이라면 어땠을까?
비즈니스의 통로로 각 국을 넘나들며, 마음속에는 한국 중심의 질서를 설계하고자 고민한다면? 그런 이들이 많다면, 미국이 한국 내 미군 주둔 규모와 전략을 재조정 중이라는 오늘 자 뉴스 속에서도 우리가 스스로 지켜낼 수 있는 힘, 그리고 기대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커리어나 사업의 미래를 그릴 때, 당연한 전제로 깔려 있던 글로벌주의는 유예된 듯 하다. 적어도 미국 중심의 상호관세주의가 자리를 잡기 전에는. 기업이든 개인이든 불가항력적인 지정학적 한계를 외면한 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하기는 어려워졌다 판단된다.
이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나아가건, 한국의 미래를 보다 전략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는 젊은이들에게 정치적 변화를 민감하게 읽고, 그에 따라 친밀하게 외부의 잠재적 적들과 소통하고, 경험을 쌓아나갈 수 있는 역량을 키워주는 과정이 제시되어야 할 듯하다.
더 이상은 한반도에서 공격을 받았을 때에야 대응하는 방식은 무의미해 보인다. 더구나 전쟁이나 침공의 양상이 이전과는 다르게 일상이 유지되는 상황 속에서 오랜 시간 지속되는 형태라면, 언급한 변화 정도는 절실해 보인다.
그래서 일본에서 나눈 그와의 대화는 꽤나 의미가 깊다.
많은 단서를 제공해 준다.
우리는 준비되어 있는가?